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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견됐다. 또 19일에는 논산, 광주에서 하사
■3·1운동의 성격
이하 보병 8명이 파견됐다. 그리고 3월 27일부
이상에서 언급한 아산지역의 3·1운동을 중심으
터 30일 사이에 보병 80연대 중 공주 똔 홍성,
로 이 지역의 3·1운동은 다음과 같이 그 성격을
온양에 1개 중대식이 증파됐다.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산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온
첫째, 아산지역의 3·1운동은 2차에 걸쳐 집중
양헌병대와 관내 각지에 있는 헌병주재소 및 보
적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병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둘째,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말과 4월초에
우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
격렬히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만세를 부른 후 다음날인 12일에도 독립만세운
셋째, 아산지역의 3·1운동은 평화적 만세운동
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온양헌병대
과 폭력적 독립운동을 병행하여 전개한 독립만
는 헌병분대장 이하 13명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세운동이었다.
학교 앞에 임시 헌병대 파출소를 설치하여 의심
넷째, 아산지역의 3·1운동은 횃불을 올리고 만
이 가는 학생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등의 탄압
세를 부르는 횃불만세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독
을 자행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일제의 무력적 대
립만세운동이었다.
응을 시작했다. 12일 온양시장에서 학생과 지역
다섯째, 아산지역의 3·1운동은 일제의 강압적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에 헌병들이 출동하여 독
탄압을 받은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립만세를 제지하고 주동인사 5명을 체포했다.
여섯째, 아산지역의 3·1운동은 여러 계층에 의
이어 14일 온양에서는 현창규 등이 시장에서 만
해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세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헌병 6명과 수비대
일곱째, 아산지역의 3·1운동에는 여성이 주도
보병 10명을 출동시켜서 만세군중을 제지하고
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22명을 체포했다.
아산지역에서는 3월 31일 염티 백암리에서 영신
동일 영인에 온천리 헌병분경소 7명을 출동시켜
학교 여교사인 한연순(당시 22세)과 이화학당 학
만세 군중들을 잠시 진정시키고 오후6시경에는
생인 김복희(복술, 당시17세)가 주도하여 마을의
읍외에서 집합한 군중들이 읍내로의 진입을 시
북쪽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도하려는 것을 저지시켰다. 15일 독립만세운동
이 운동으로 한연순은 직역3월, 김복희는 징역2
때는 9명을 체포했다.
월을 선고받았다. 이와 같이 여성들이 독립만세
3월 말인 31일에는 온양 북방 1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여성
운동이 있어 군대와 협력하여 발포 등 무력진압
의 민족운동사와 여성운동사에 획기적인 계기가
으로 만세군중을 해산시켰다. 또 아산 인근의 면
됐다.
지역 50여 개소에서 횃불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자료출처 : 선장 기미년조선독립운동및무인년멸왜운동기념탑
일제는 신속히 헌병대를 출동시키고 군대의 협
책자 중에서>
력을 받아 발포하면서 만세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주동 인사 12명을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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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타이딩
A-san of Ti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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