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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택 신도비는 고남리(아남이) 입구인 남산의 북향사면
말단부에 위치한다. 신도비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장방형 비
좌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를 올린 형태이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86㎝, 너비 53㎝, 두께 45㎝이다. 윗부
분에‘유명조선국호조참판증이조판서시충정김공신도비(
)’라고 전서로
쓰여 있고, 4면 전체에 김운택의 행적과 가계에 관하여 자세
하게 쓰여져 있다. 비문은 윤봉구가 찬하였는데, 1882년(고종
19)에 신도비를 세우면서 6대손 김봉수(?
記를 짓
고, 윤봉구의 글도 함께 썼다.
김운택(?
1673~1722)은 본관이 광산이고, 자는 중행
), 호는 백운헌(
)이다. 1699년에 사마시에 합격,
김운택 신도비
진사가 되고, 1704년 문과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승지가 되고, 이후 세자의 명에 의해 충청도균전사(
)가 되었다. 그 뒤 부제학, 호조참판,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722년에 반역을 도모한다하여 장살
되었다. 1779년(정조 3) 충정공(
公)의 시호를 받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한편, 아들인 미암(
) 김위재(?
)가 1813년(순조 13)에 인지면에 있는 송곡사에 배향되었다.
운산면 여미리 서당골 중앙에 이택 신도비가 남동향으로 위치
하고 있다. 이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암 기단석에 너비 103㎝,
두께 44㎝, 높이 234㎝의 비신을 올렸고, 옥개석은 반전이 강하
며 기와골 무늬가 있다. 1731년(영조 7)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윤
봉구(
九)가 찬하고, 김진상(?
)이 썼으며, 조상(
전( )하였다.
이택(1651~1719)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운몽(
)이며, 이진백의 아들이다.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고산진 첨절제사(高
)등을 역임하
였으며, 그 뒤 남구만(南九 ), 이상진(
) 등과 교유하면서
이들의 추천으로 도총부경력(
經 )이 되었다. 이어 사복사
이 택 신도비
내승(
內 )을 거쳐 훈련원정, 전라좌도수군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성이 순결하고 청렴하여
이름이 높았다. 문예에도 조예가 깊어 시조 2수가 전한다.
서산지역에는 이처럼 명현들의 신도비가 많이 있다. 이들 신도비 자료들은 조선시대 인물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조사를 통해 관련기록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김적 및 김홍욱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고시 된 것은 그 가치를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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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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