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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의 참여도 있었으며, 공주의 갑사나 동학사의 승려들의 의연도 이어졌다.
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한말의 의병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의군부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예산에서는 1907년 3월부터 ‘의연금모집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의연금 모금을 추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경상 지역에는 민단조합, 풍기광복단, 이동권회복
진하였다. 예산군 의연금모집소의 발기인은 정낙용(鄭洛鎔), 이범소(李範紹), 홍혁주(洪赫
단 등의 비밀 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하였고, 대구에서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연
周), 정준용(鄭俊鎔) 등 19인이었다. 이들은 취지서를 발표하고 운영 방안을 발표하며 의연
합하여 1915년 광복회가 비밀리 조직되었다. 충남 지역에서의 1910년대 독립운동은 독립
금을 모금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15일자 광고에 의하면, 김문화 등 50여 명이
의군부와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단체 활동으로 나타났다.
61원을 납부하였다. 이 중에는 김운하(金雲夏), 손운일(孫云日), 이순경(李舜卿)은 각기 5
독립의군부는 임병찬이 총 대표가 되고 8도에 대표를 둔 전국 규모의 단체였다. 임병찬
원을, 성낙천(成樂天) 부부는 1원 50전씩을 냈다. 70세 노파인 임소사와 유기점을 운영하
은 순창전투의 일로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1913년 초부터는 아들 임응철과 손
는 과부 박소사가 20전씩을 의연하여 예산 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자 임태흥을 각지의 애국지사에게 보내 동지 초모 작업을 개시하였다. 임병찬은 조직을 마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내면의 봉동에 사는 12세 이관구(李觀求)도 의연금 모금일을 맞아
친 후 날짜를 정해 전국의 각 군에서 일제히 국권 반환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장서 투
신화 50전을 내놓았다. 특히 시동(侍洞)에 거주하는 고용인 김재화(金才華), 홍구봉(洪九
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투서하기 2일 전에 각 군의 사직단 터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奉), 권종식(權鍾植) 등의 참여는 주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덕산에서도 국채보상
민심을 움직이게 하였으며, 투서 후에는 향약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원
수합소를 설치하였다. 발기인은 이두복(李斗馥), 조종호(趙鍾灝), 이두재(李斗宰), 이붕구
군 대표 김창식이 청양에서 체포되어 조직이 발각됨에 실행될 수 없었다. 예산군의 대표는
등이었다. 수합소의 소장은 조종호, 부소장은 이지헌(李智憲), 재무 유중현(劉仲鉉), 감독
홍주의병에 참여하고 이 일로 쓰시마에 유배되었던 건 남규진(南奎振)이었다.
은 이붕구, 이두재였다. 이들은 신문에 취지서를 발표하고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이에 따라
1910년대 대표적인 국내 비밀 결사로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가 있다. 광복회는
정인영(鄭寅英)이 가세를 돌보지 않고 많은 액수를 의연하는 등 많은 이의 참여가 이어졌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혁명 기지를 확보한
다. 수합소에서는 1907년 5월말 그동안 수합한 의연금 651원 28전 5리를 대한매일신보사
후 적당한 때에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혁명 단체였다. 광복회는 각지에 혁명 기지를 세웠는
에 납부하였으며, 6월말에는 2차 의연금으로 51원 80전을 납부하였다. 6월부터 시작된 대
데, 예산군 광시 출신의 김한종(金漢鍾)은 광복회에 참여하여 충남지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흥군에서도 많은 참여가 있었다. 윤두선(尹茂善), 이기완(李起完) 등 400여 명은 501환 30
맡았다. 김한종은 홍주의병에 참여한 김재정(金在貞)의 장자로 예산과 연기에 곡물상을 두
전을 모금했다. 모금 활동은 11월 중에 가장 활발하여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어 거점으로 삼고 타 지역에 비해 투쟁적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 충남지회에 참여한 예산
출신으로는 지부장 김한종을 비롯해 그의 부친인 김재정과 김재풍(金在豊) · 김재창(金在
昶) · 김재철(金在哲) 등 김녕김씨 문중 인물들과 그의 제자인 김상준(金商俊) · 이재덕(李
3.일제강점기예산지역독립운동
在德) 등이 있다. 광복회의 활동 중에 두드러진 것이 칠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과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의 처단 건이었는데, 특히 박용하의 처단은 충남지회의 책임자인
1)1910년대독립운동
김한종과 장두환 등에 의해 1918년 1월 단행되었다. 광복회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발송한 통고문을 수령한 자산가들이 신고함으로써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상황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포악한 무단 통치를 강행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과 정규
에서 충청도 지부에서 도고면장 처단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충청도 지부원들이 계속해
군의 주둔을 증가시켰으며, 각종 법적 장치를 통하여 한반도 전체를 감옥과 같은 ‘병영국가’
서 체포됨으로써 광복회는 크게 와해 되었다. 김한종은 예산의 자택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
화 하였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의병 전쟁의 중심이 이북 지역으로 이동하다 독립군으
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919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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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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