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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이에 따라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여 다음 날 안병찬과 채광묵이 이 부대를 인솔
질렀다. 이때 그의 아들인 이충구와 노비인 김응길도 함께 학살당하고 가수
하여 홍주성에 제일 처음 입성하였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에서 이봉학 · 이세영
복은 중상을 입었다. 박창로는 청양의 합천전투에서 안병찬 등과 함께 체포
· 김정하 등 수백 명이 성안에 들어와 숨었다. 12월 2일, 예산 출신의 박창로가 사민 수백 명
되어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 다시 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
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
다. 남규진은 홍주의병의 돌격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홍주성전투에서 체포되
에 집결하였다. 다음 날 홍주성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러
어 쓰시마에 유배되어 2년 이상 고초를 겪었다.
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과 이설을 비
한편 개화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신교육 및 실업 진흥을 통
롯하여 홍건 · 안병찬 · 이상린 · 송병직 · 임승주 등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김복한 · 이설 ·
해 실력을 양성하고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을
홍건 · 안병찬 · 송병직 · 이상린(이상 홍주6의사) 이외의 17명은 모두 무죄 석방되었다. 김
사조약의 강제 체결 등 일제의 침략에 분노한 시민들은 서울과 도시를 중심
복한 등 6명은 법부의 훈령에 따라 1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여 한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이
으로 항쟁을 벌여나갔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비롯한 많은 관료와 유생들
수당이남규
들은 2월 23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의 공초를 받고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
은 고종에게 조약문에 서명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민영환, 조
방, 귀향하였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예산 출신인으로 박창로과 이봉학 등이 있다. 박창로는
병세, 송병선 등은 자결로써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고, 나인영은 을사조약에
수백 명을 이끌고 홍주성에 들어가 김복한을 창의대장에 추대하고 활동하였다.
찬동한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홍주 일대의 사민들은 1906년 3월에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의병을 재기하고 민종식을 의
개화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신교육 및 실업 진흥을 통해 실력을
병대장에 추대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 2월 21일) 의병장에 올라 예산의 광시에서 의
양성하고자 하였으며, 나라의 빚을 상환하려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그
병을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렸다. 그리고 홍
리고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등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 계몽
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이용규가 초모한
운동가들은 국내에서의 항쟁이 어려워지자, 만주의 삼원포 일대에 독립운동
의병을 중심으로 부여의 지티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의병은 남포전투를 승리한 후 5월 19
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일 홍주성을 공격하여 다음 날 점령하였다.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
예산 지역에서의 애국계몽운동은 그다지 활발한 편이 못된다. 이것은 예
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
산을 포함한 충남 지역이 보수적인 유생층이 두터웠던 점에서 애국계몽운동
령하였다. 결국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성재한, 전태진, 서
이 전개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
기환, 전경호, 이재형을 비롯하여 300여 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8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인다. 대표적인 애국계몽단체의 하나인 대한자강회에서는 전국에 26개소의
중에서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이식, 안항식 등 9명은 쓰시마에 유배되었다.
지회를 설치하였는데 충남에서는 직산 1개소에 지회가 있었을 뿐이었다. 예
홍주의병에 참여한 예산인은 이남규를 비롯하여 성재한, 박창로, 남규진 등이 있다. 성재
산인들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충
한은 의진의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홍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일본군의 총공격에 형세가
남 각지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국채보상수합소, 호서협성회 등 20개소에 달
기울자 민종식 등은 성을 넘어 피신하였다. 그러나 성재한은 “나는 중한 책임이 있다. 이 문
하는 국채보상금 수합소가 설치되어 활동하였다. 이 단체의 주도자는 전현
부(文簿)들을 안고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 전사 순국하였다. 이남규는 합천전투에
직 관리와, 자산가, 종교인, 교사, 학생 등 주로 지방의 유지층이었다. 참여
서 안병찬 등이 체포되자 이들의 구명 운동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계층은 다양하였다. 노동자, 유생층, 상인층, 심지어는 아동들도 있었다. 아
의병의 재기를 두려워 한 일제는 1907년 9월 그를 체포하여 아산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
동의 세뱃돈이나 노동자의 임금 의연 등도 있었고, 종교계 학교의 학생이나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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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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