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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다 가납하지 않았다. 임자년(1732) 모친 박씨 상을 당하여 전과 같이하고 정사(丁巳
1737년 영조)년 봄에 부응교 윤급이 상소하여 전일의 처분이 과하여 마땅히 다시 불러 강론케
하라고 하니 불허하고 신유년(1741 영조) 겨울에 김재로 가 다시 상소하여 구명하니 왕이 경
연관 복직을 명하였음. 또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가 다시 신해년(1731영조) 삭탈한 명의 업교
를 효주(爻周 : 글자를 효자 모양으로 지워버리는 것) 하였다. 계해년에 장령을 제수하고 집의(執義 : 사
헌부)로 승진하였으나 다 무진년(1748 영조)에 유생 심빈(沈빈) 등이 불러올 것을 상소하여 청하
니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먼저 선생은 한수(寒水) 선생(권상하 權尙夏) 행장문을 짓고 그 팻말에
주자가 빠트린 우리 동도(東道)에 그 도를 전하하는 책임자가 율곡, 우암 송시열, 양 선생이
가장 나타났다는 말을 이것은 본디 원생에게 기뻐하지 않은 것이라 사옹(三翁 金김생)이 도통
의 권법에 폄출(貶黜 : 폄하하여 빼버림)되어 사옹의 후손이 서로 종용하여 합세 선동문으로 구건
(具楗) 등 심여인이 청죄(請罪 : 죄를 청하는 것)함을 투소하니 승정원에서 그 투소를 물리쳤다. 경
오(1750 영조) 왕이 온양으로 행궁(幸宮 : 왕의 행차로 임시 궁궐) 선생이 먼저 홍천읍에 당도하여 유
시를 불렀으나 소를 올려 병세로 사직하고 그 해 겨울에 조금 덜하메 부축하여 고향에 돌
아와 신미년(1751 영조) 이월에 우연히 감기로 그 해 팔일 병자일에 양곡 정신(결성 양곡리)에
임종하였다. 치상엔 심의(深衣) 야복(野服) 난삼(난삼)을 쓰니 다 우암의 옛 가례를 준수한 것이
라. 사월 을유에(사월 18일) 근수공 선생의 구택은 결성 남당 간 판교 궁호리에 옮기고 부모님
상소를 양곡에서 이장하고 그러부터 후학자가 혹 양속선생이라 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창
녕성씨 중광의 딸에 장가들었다. 묘소는 선생 묘소 우편하에 있고 아들 하나를 낳으니 후
(殷 : 후은)은 여흥민씨 진화의 딸과 재취로 두 아들을 낳았다. 후종 후현 이고 측실(側室) 아들
후준은 일찍이 죽고 딸은 이사량에게 출가했다. 후은은 아들은 없고 죽음 네딸만 최박, 유
면중, 정재희, 오재진에게 출가하다. 후종 두 아들은 어리고 후현 삼남은 장성하여 세상에
나태고 후은의 나머지는 어리다 오호라 선생이 죽은지 이미 이기(二紀 : 이십이년)이니 유궁(幽
宮 : 산소)에 묘지(墓地)가 없어 후종과 문하인 옛사람들이 잊혀진 일은 다 본말을 실로 징험할
수 없음으로 한록(漢祿 김한록)이 아는 바로 외람되어 부탁을 받고 부탁은 그 사람을 되돌아보
지 않고 어찌 감히 승당(承當 : 받아들어 감당함)하리요. 여러번 사양하니 더욱 부탁하여 어찌 차
마 사양하리요. 삼가 평일에 듣고 보고 한 것을 참고 하고 구람 공의 행장을 찬하매 다음에
162_홍성의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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