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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의간척과개척 ?159
쪽에는 부엌을 만들고, 그 앞쪽에는 현관을 두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에는 4
가구가 거주했다. 큰방에는 4명, 작은 방에는 3명이 거주했다. 약혼한 이들에게
우선 분배했고, 혼인한 이들에게는 식량을 배급해 별도로 식사를 마련해 먹도
록 했다. 식수는 공동우물에서 길어다 먹었다. 주거지로부터 100~200미터 간격
으로펌프가설치되어있었기에큰통으로길어다먹었다.
수용 생활을 하는 동안 생필품과 먹거리는 국가에서 지급해 주었다. 당시 보
건사회부에서 구호대상자에게 지급하던 밀가루와 옥수수가루가 지급되었고,
생필품은 압수한 밀수품을 지급해 주었다. 세면기, 건설단 식기, 양은솥, 수저
가 전부였다. 식기는 한 되 들이로 강원도 건설단이 사용하던 것이다. 배급은
일주일에 1회 주었는데, 1일 1인당 보리쌀 1홉, 쌀 5작으로 계산해 주었다. 그
양이 매우 적었기에 마른 시래기를 먹기도 했을 정도로 배를 곯았다고 한다. 혼
인 후에는 여자와 남자 모두 작업에 동원되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은 아침,
점심,저녁식사를공동으로해결했다.작업은저녁늦은시간까지지속되었다.
1966년 9월에 개척단원들 사이에서 강제수용생활이 문제임을 인지하고 개척
단원의 1/3이 함께 데모를 일으켰고, 나머지는 동조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더
이상 임원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고 하며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개척단원은 자신들의 삶이 너무 비참했다고 회상한다. 결국 단원들의
요구를 임원들이 수용하면서 개척단이 해체되었다. 수용자들에게 자유가 주어
진 것이다. 그동안 작업장 주변에 둘러졌던 인간 철조망도 사라졌다. 막사에 남
은 이들이 첫날에는 50명이었으나 하루가 지나니 30명이 남았다. 이틀이 지나
니 10명 미만만이 남았다. 개척단원들의 반수는 자신들이 개간하던 땅을 그대
로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남아서 개간을 지속했다. 그러나 혼인을
해서 자손을 두기도 했으므로 밀가루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남
자들은외지로돈을벌러나갔다.여자들은마을에남아지속적으로개간했다.
1970년대에는 개척단원의 일부가 다시 이곳을 떠나면서 또 다시 토지가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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