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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병(散兵)을 上취해서 임존성을 차지했다. 산은 원래 험악했으나 10
일도 되지 않고 돌아오는 자들이 3만이 되었다. 소정방(蘇定方)은 이를
공격해서 돌파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200을 넘은 성을 회복했다.
다른 장군(別將)이 사타상여(沙?相如)와 함께 복신을 응원했지만,
용삭중(龍朔中) 당나라 고종(唐高宗)에 사자(使者)를 보내 초론(招論)
하는데, 형세가 좋지 않는 것을 헤아려서, 끝내 유인궤(劉仁軌)를 예
강(詣降)했다.
지수신(遲受信)은 유인궤(劉仁軌)가 백강(白江)에 도달해서 일본원
병(日本援兵)을 만나 사전(四戰)해서 다 승리하지 못했다. 풍(豊)은 고
구려(高句麗)에 도주(逃走)했고, 왕자 부여(扶余) 충승(忠勝)과 충지
(忠志)들은 일본 잔병(殘兵)들과 함께 항복했다.
혼자 지수신(遲受信)이 임존성이 위치가 험하고 성의 수비가 경고
하고 식량도 있기 때문에 악전고투(惡戰苦鬪) 삼순(三旬)도 버티고 있
었다가 성은 함락하고 결국 처자(妻子)도 버리고 고구려에 급히 도주
했다.
후백제 견훤(甄萱)군이 이 성에 농성해서 반역을 꾀하여 고려(高
麗) 태조(太祖)는 이것들을 다시 살확(殺穫)한 것이 3,000명이 되었는
데, 지금 성 모습은 훼괴(毁壞)해서 유적만 있다.
2. 역탑리(驛塔里)
오가면 역탑리는 옛 한국시대의 통신기관이었던 이른바 역(驛)이
있었던 장소이며, 교통의 요소이자 이조(李朝) 시대(時代)에 있어서는
어사(御使)의 정한 숙박지이었던 정도로 군내의 은성지(殷盛地)였다.
이조(李朝) 말기, 어사(御使) 홍철주(洪徹周)가 예산에서 이 마을에
160 예산군지(19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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