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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왜군들을 떨게 하였던 충장공 김덕령은 고문 끝에
아산의역사성을정립하고자노력하고있다.
장살되었다.
단편적으로 아산시의 중심이랄 수 있는 온양온천역은 내
한줌도 안되는 조정의 편협함과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외 방문객이 가장 많은 장소임을 감안하여 외벽에 ‘아산
아랑곳않은당시의한심함이었다.
의인물’을돌에새겨서장식하고있다.
면면을 보면, 충무공 이순신을 필두로 고불 맹사성, 토정
임기를 다하여 홍가신이 홍주를 떠나자 홍주 인근에서는
이지함, 장영실을 조성하여 그들의 간략한 치적과 함께
기근과전염병까지만연하여척박한삶이더욱모질게되
게재하여 놓았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우리 아산에서 태
었다. 마을 사람들은 목사 홍가신의 선정과 용기를 그리
어난 분은 한 사람도 없고 다른 도시에서도 그 지역의 인
워하며 홍주의 진산인 백월산에 홍목사의 조각상을 만들
물로중복되어선정한사례까지있는실정이다.
어서 제를 올렸더니, 희한하게도 병이 낫고 농사에 안정
이분들은 모두가 지명도가 높고 후손에게 귀감이 될만한
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나라님과 나리님들이 모두 저버
인물임은 자명하겠지만, 적어도 선영이 모셔있다거나 아
린 백성들에게 홍가신은 곧 어버이였고 산신으로 모시어
산지역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을 경우가 아니라면 오히
위안을 주고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려결례되는일일수도있겠다는생각이다.
홍성군에서는 홍가신을 추모하는 제의식을 거르지 않고
있으며,백월산정상에는산신각에조각상이모셔있다.
주지하다시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서울에서 탄생하였
당시에 멀지 않은 아산이라는 고장에서 살아있는 실존인
지만 유년시절부터 아산에서 생활하면서 무과시험을 준
물을산신으로모신이례적인사례이지만,목민관이지녀
비하였고,현충사라는대표적사당이현존함과동시에묘
야 할 자세의 모범이자 학문을 하는 진정한 이유가 제시
역이조성되어있는아산의인물임에이론이없다.
되는만전당홍가신의발자취에서깊이성찰하여야할역
한편,만전당홍가신의경우에는아산에서태어나고아산
사의한페이지가아닐수없다.
에서말년을맞이하며묘역까지조성된분이다.임진왜란
홍성군에서 산신으로 모시는 홍가신이다. 아산에서도 한
7년 전쟁의 동시대에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
집안의가장이자,나라로부터부여받은직책을숭고히수
장군과는 사돈이라는 특수한 인적관계까지 맺고 있을 정
행한목민관홍가신의뜻을기리고선양하는분위기가조
도로두분의고택은지척에있다.
성되어후손들의귀감이되는데힘썼으면좋겠다.
전란이 끝난 후 나라가 안정을 찾아갈 즈음, 7년간의 전
지방자치제도가활성화되면서각고장마다지역을대표하
쟁을 극복한데 대한 공신을 책록 하는 과정을 치르게 된
는 역사적인 인물을 부각시키는 노력이 경쟁적이다. 어떤
다. 선조 임금은 선무공신 18명, 청란공신 5명, 호성공신
경우에는 억지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생애와 해당 도시의
86명을선정하여치하하였다.
연관성이 적은 인물까지도 편입시키는 사례도 있고, 지역
목숨을 바쳐 왜군을 섬멸하고 강토를 지킨 이는 고작 18
축제와연계하여인물의선양사업에활용하기도한다.
명!의병은그의안중에없었다.
아산시의 경우에도 각종 매체는 물론 가시적인 전시물과
내란을 평정하여 나라체제의 전복을 막아선 공신은 5명.
동상의 건립을 통해 아산의 인물을 홍보하고 그에 따른
그런데 의주까지 자신을 호위하며 뒷바라지 한 사람들은
14 ChungnamCulturalMagazine! 2022! N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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