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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읍의 성문 밖, 나루터
, 궁벽한 산간 소로
, 3~4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곳, 우역
13)
14)
등지의 순으로 분포하였다. 험한 영로(嶺路) 지대에 많은 원이 설립된 이유는 도적 떼의
출몰, 도로의 훼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세조 때에는도적의 출몰이 잦은 곳에 각 군
현의 번상군(番上軍)을 원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10~20명씩 파견하였다.
영남대로 지
15)
역의 경우에 원과 역이 같은 장소에 설치되어 하나의 교통취락을 성립시킨 예는 매우 드
문편이다.
16)
원촌(院村)은 1~5동의 원우(院宇)와 약간의 일반 가옥으로 이루어진 작은 촌락에 불과
하였다. 일반적으로 여행객이 묵을 수 있는 집으로서 원우를 짓고, 원주(院主)가 관리를
맡았다. 새재제3관문조령관(鳥嶺關) 북쪽연풍현고사리면에설치되었던신혜원(괴산군
연풍면 신혜원리)의 경우, 주인이 거주했던 안채, 여객용 바깥채, 말의 보호시설인 마방
(馬房) 등으로구성되어있었다고한다. 안채는온돌방2개, 부엌, 대청, 광등이‘ㄱ자형’
으로있었고,바깥채는온돌방3개, 마루방1개,대청,부엌등이있었는데바깥채의대청
은 식당 겸 술청으로이용되었다고 한다.
17)
원주는 대로는 5호, 중로는 3호, 소로는2호
가 있었는데, 각각 5부(서울지역)와 수령(지방)이 원 부근에 사는 백성들 가운데 승려·향
리·관리 등을 임명했다. 원주는 잡역을 면제받는 대신 원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원주는
원의 원위전(院位田)을 받아 원의 운영 경비로 사용했는데, 대로는 1결 35부(負), 중로는
90부,소로는45부를받았다.이는한성부와관찰사가각각감독하였다.
18)
그러나 원은 성종 때 이르러 이미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원위전은 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에는 부족했고, 원주인은 전직 승려나 양인 중에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회에서는 이들을 양인 이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16세
기 중반 이후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방치되는 원이 더 많아졌다. 더구나 임진
왜란이후에는전란의영향으로많은원이폐쇄된후복구되지못했다. 이는고관들이많
이이용했던군·읍의객관이나역관들이대개복구되었던것에비하여,역(驛)의보조기관
13)갈수기에는징검다리또는나무다리를이용하고,홍수때에만나룻배를띄운곳에도원이있었다.
14)인가가드문깊은산중을여행하는사람들을보호하고자하였다.
15)『세조실록』권3912년8월을묘조
16)최영준,앞의책,302쪽.
17)최영준,앞의책,297쪽.
18)『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_역사를 품고 살아 숨 쉬는, 홍성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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