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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증조부월성위김한신과화순옹주의정절_화순옹주홍문(紅門)
ㆍ개요(synopsis)
추사의증조부인월성위김한신이젊은나이로죽자화순옹주는곡기를끊어남편의뒤를따랐
다. 이에 정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려 열녀정문을 내리니 그것이 추사고택에 있는 화순옹주
홍문이다.
ㆍ내용(contents)
추사의증조부인김한신(金漢藎,1720~1758자는유보(幼輔))은조선후기의문신으로아버지
는 영의정 흥경(興慶)이며, 어머니는 황하영(黃夏英)의 딸이다.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
옹주(和順翁主)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제용감제조
를지냈다.키가크고인물이준수했으며총명하여재주가뛰어났다.특히,글씨를잘썼는데그
중에서도팔분체(八分體)에뛰어나,애책문(哀?文)·시책문(諡?文)등을많이썼다.전각(篆刻)에
도뛰어나인보(印寶)를전각하기도하였다.시호는정효(貞孝)이다.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는 영조(英祖)의 서장녀로 어머니는 정빈이씨(靖嬪李氏)이다.
1725년(영조1)2월18일에화순옹주(和順翁主)로봉해졌고,1732년(영조8)영의정흥경의아
들인월성위김한신과결혼하였다.1758년(영조34)1월4일남편인김한신이죽자화순옹주는
곡기를끊어월성위의뒤를따르려했다.이소식을들은영조는“화순옹주는월성위가죽은뒤로
부터7일동안곡기를끊었다고하니,음식을권하지않고좌시하면,어찌아비된도리라하겠는
가?”라며4일후인1월8일화순옹주방에거둥하였다.그러나결국곡기를끊은뒤14일만에죽
고만다.이에1783년(정조7)2월6일에정조는화순옹주의정절을기려서열녀정문을내렸다.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은추사고택옆(충남예산군신암면용궁리799-2)에위치해있는데
유형문화재제45호로지정되어있다.능원(陵園예산군신암면용궁리)에는남편인김한신과합
장되어있는데비문은영조의어필(御筆)이다.문화재자료제189호로지정되어있다.
월성위(月城尉)김한신(金漢藎)이졸(卒)하였다.조정에서받들어위로하고,정후(庭候)하였다.하
교하기를,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은 최초의 도위(都尉)로 염아(恬雅)하고 근칙(謹飭)하여 마음으
로항상이를아름답게여겼는데,어찌한병으로의약의효험이없을것을뜻하였겠는가?갑자기
이소식을들으니,슬픔을어찌비유하겠는가?무릇여러가지일은일체해창위(海昌尉)의예(例)
에 의하여 거행하고, 장생전(長生殿) 퇴건(退件)의 구재(柩材)를 골라서 보내며, 3년을 기한하여
월름(月?)을그대로주고,시호(諡號)의정(議定)은성복(成服)을지난뒤에곧거행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은말한다.“김한신은고(故)상신김흥경(金興慶)의아들로서천가(天家)에빈생(賓甥,
사위)이되었는데,부귀로생장하였으나분화(芬華)함을좋아하지아니하여의복이한사(寒士)와
같았으며, 출입에 초거(?車)를 타지 아니하고 항상 말을 타며 많은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다니
니,가로(街路)의사람들이간혹도위가된것을알지못하였다.성품이효우(孝友)하고공근(恭謹)
하여교만하고귀한뜻이절대로없으며,노예를엄하게단속하여여리(閭里)에횡포하고방자함
이없도록하였다.위로는진신(搢紳)으로부터아래로는여대(輿?,하인)에이르기까지모두그
아름다움을일컬었는데,이때에이르러병으로졸하였다.임금이슬퍼함을그치지아니하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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