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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다. 마을별로 관평리 16명, 동화리13명, 거
시에 총독의 유고와 각종 회의를 통하여 운시,
산리8명, 역촌리와 송학리 각각 2명으로 5개리
경고 및 경령 등을 통하여 회유를 시도하면서 언
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관평리와 동화리 주민
론에 대한 통제도 실시하였다.
들이 29명으로 전체 70.73%를 차지하고 있다.
3·1운동 발발 때부터 시작된 일제의 무력적 진
따라서 송악에서 독립만세운동은 5개 리에서 횃
압은 3·1운동이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므로 3월
불만세운동으로 전개됐다. 특히 태형 정도와 태
7일에 첫 위수 지역을 벗어난 병력 이동으로 더
형자의 수를 고려하면 관평리와 동화리 및 거산
욱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리에서는 격렬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이에 일본 육군차관은 3월 8일자 조선헌병대사
보인다. 이어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탕정, 염치,
령관에게 통첩을 보내어 신속한 대응과 사전 예
배방 외에 온양과 둔포에서 횃불만세운동을 전
방에 주력할 것을 강요하였고, 일본 원경수상도
개했다.
조선총독에게 지령을 보내어 엄중한 처치를 지
둔포에서는 운용리의 마을 주민들이 횃불을 올
시했다. 이 무력적 진압정책은 4월 1일에 이르러
리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당시 일본인 소유인
극에 달하에 됐다. 조선주차군사령관은 통달을
광혈 20여 개소를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통해“군대는 단연 소요의 강압수단을 사용한
4월 2~3일에는 영인에서의 횃불독립만세 외에
다”
는 공식적인 지시를 내리는 한편 독립만세 군
인주 공세리와 걸매리 및 둔포 등의 해안지역에
중을 위복시키려 하였으며, 이에 고삐가 풀린 것
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만
처럼 일제의 탄압은‘광기’
를 띠게 됐다.
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조선주차군 보병, 헌병 경찰과 경찰 보조
이상과 같이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인
원뿐만 아니라 재향군인, 소방대, 거류민단 등
11일부터 12·14·15일까지 제1차 독립만세운
각종 단체와 일본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무력적
동과 3월말, 4월 초순인 3월 31일부터 4월1일
진압을 자행했다. 또 이를 위하여 일제 군경들은
~4일까지 제2차 독립만세운동으로 9일에 걸쳐
집중 배치체제로 전환시키고 관할 위수지역을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변경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외 일제는 일본 국내
주둔군 병력을 4월 4일 강의에서 헌병 약65명과
■ 3·1운동에 대한 일제 탄압
헌병 보조원 보병 약350명 및 보병 6개 대대를
(1) 일제의 대응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3·1운동을 진압하
기 위한 무력을 증강했다.
일제는 3·1운동을 한국인의 민족운동으로 인식
하지 않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한 도
(2)일제의 탄압실상
전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식민지 지배 당국인 조선총독부 뿐만 아니
우선 조선총독은 3월 12일 보병 80연대를 충남
라 공정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 기관조차도
북, 경남북과 전남북에 분산 배치로 3·1운동에
그러하였다. 그러나 3·1운동 초기에 일제 정부
대한 막적 진압을 시도했다.
는 별도의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조선총독에
충남 지방에서 병력 이동은 도청의 요청으로 3
게 일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월 15일 평안도 철도보호대에서 아산에 장교 이
발발부터 강력한 무력적 시위와 진압을 하는 동
하 10명이 파견되고 온양에도 하사 이하의 병력
16 |
아산타이딩
A-san of Tidings
시에 총독의 유고와 각종 회의를 통하여 운시,
산리8명, 역촌리와 송학리 각각 2명으로 5개리
경고 및 경령 등을 통하여 회유를 시도하면서 언
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관평리와 동화리 주민
론에 대한 통제도 실시하였다.
들이 29명으로 전체 70.73%를 차지하고 있다.
3·1운동 발발 때부터 시작된 일제의 무력적 진
따라서 송악에서 독립만세운동은 5개 리에서 횃
압은 3·1운동이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므로 3월
불만세운동으로 전개됐다. 특히 태형 정도와 태
7일에 첫 위수 지역을 벗어난 병력 이동으로 더
형자의 수를 고려하면 관평리와 동화리 및 거산
욱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리에서는 격렬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이에 일본 육군차관은 3월 8일자 조선헌병대사
보인다. 이어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탕정, 염치,
령관에게 통첩을 보내어 신속한 대응과 사전 예
배방 외에 온양과 둔포에서 횃불만세운동을 전
방에 주력할 것을 강요하였고, 일본 원경수상도
개했다.
조선총독에게 지령을 보내어 엄중한 처치를 지
둔포에서는 운용리의 마을 주민들이 횃불을 올
시했다. 이 무력적 진압정책은 4월 1일에 이르러
리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당시 일본인 소유인
극에 달하에 됐다. 조선주차군사령관은 통달을
광혈 20여 개소를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통해“군대는 단연 소요의 강압수단을 사용한
4월 2~3일에는 영인에서의 횃불독립만세 외에
다”
는 공식적인 지시를 내리는 한편 독립만세 군
인주 공세리와 걸매리 및 둔포 등의 해안지역에
중을 위복시키려 하였으며, 이에 고삐가 풀린 것
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만
처럼 일제의 탄압은‘광기’
를 띠게 됐다.
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조선주차군 보병, 헌병 경찰과 경찰 보조
이상과 같이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인
원뿐만 아니라 재향군인, 소방대, 거류민단 등
11일부터 12·14·15일까지 제1차 독립만세운
각종 단체와 일본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무력적
동과 3월말, 4월 초순인 3월 31일부터 4월1일
진압을 자행했다. 또 이를 위하여 일제 군경들은
~4일까지 제2차 독립만세운동으로 9일에 걸쳐
집중 배치체제로 전환시키고 관할 위수지역을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변경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외 일제는 일본 국내
주둔군 병력을 4월 4일 강의에서 헌병 약65명과
■ 3·1운동에 대한 일제 탄압
헌병 보조원 보병 약350명 및 보병 6개 대대를
(1) 일제의 대응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3·1운동을 진압하
기 위한 무력을 증강했다.
일제는 3·1운동을 한국인의 민족운동으로 인식
하지 않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한 도
(2)일제의 탄압실상
전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식민지 지배 당국인 조선총독부 뿐만 아니
우선 조선총독은 3월 12일 보병 80연대를 충남
라 공정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 기관조차도
북, 경남북과 전남북에 분산 배치로 3·1운동에
그러하였다. 그러나 3·1운동 초기에 일제 정부
대한 막적 진압을 시도했다.
는 별도의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조선총독에
충남 지방에서 병력 이동은 도청의 요청으로 3
게 일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월 15일 평안도 철도보호대에서 아산에 장교 이
발발부터 강력한 무력적 시위와 진압을 하는 동
하 10명이 파견되고 온양에도 하사 이하의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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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타이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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