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4페이지

16페이지 본문시작

써 이 고장의 대중문화를 전파하고 마음의 안식처로 기여한 영향은 컸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일본인들
의 차별이 심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자극 하였던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책에서 나온 근성
은 이 극장을 운영 하는데 있어서도 열외는 아니었다. 이 극장의 운영권은 물론 모든 지휘 감독체계
도 일본인들이 도맡아 하였다.
차별대우의 한 가지는 실례(實例)를 든다면 동 극장의 앞자리와 관람하기 좋은 자리들은 모두 일본인
들의 전용 좌석으로 그들만이 이용하게 하였으며, 뒷좌석과 입석 등에 한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차
지가 되도록 엄격하게 통제하기도 했다.
이 극장에서 연극이나 영화가 공연케 되면 이 프로를 선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내 일원을 악대가
돌아다니며 광고를 했다. 그리고 연극이나 영화 상영이 없을 때에는 갖가지 문예활동도 심심치 않게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이미 고인이 된 홍남표가 당시의 빅타 레코드에 취입까지 한 실력 있는 노래 솜
씨 때문에, 그리고 일본 동경 음악학교에서 전공한 바이올린 솜씨가 뛰어난 이유로 유석환들이 가끔
당시의 일본군인들을 위안하기 위한 공연에 초청되어 우리말 노래와 애환이 깃든 옛 노래들을 바이
올린으로 연주하여 아낌없는 절찬의 박수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아리랑, 검사와 여선생 등의 영화와 연극이 공연되어 관객들의 심금을 뒤흔들었던 것도 이 무렵
이었는데 이토록 갖가지 화제거리가 얽히고 설킨 이 천낙관이 원인모를 화재가 나서 하루아침에 폭
삭 주저앉아 버리게 되자 그나마 굶주린 오락이나 공연의 충족을 이루어 왔던 주민들의 실망은 컸었
다. 그러나 1년 남짓 후쯤 천안에도 상설극장이 없었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이곳 온양에다 상당한 거
액을 들여 비록 200여 석 밖엔 안되었지만 목재 건조의 2층 건물로서 상설극장을 건립하게 되니 이
것이 온양 지방에는 천낙관에 이어서 두 번째로 생긴 극장이 된 것이다. 이 상설극장의 명칭은 온양
극장이라고 붙여졌다. 이 때부터 다시 연예활동이 활발해 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충남 도내에는 대
전을 빼고는 이러한 훌륭한 극장시설이 없었다. 이렇게 온양극장이 새로 등장하게 되자 일본인들의
“사무라이”영화와 기단 공연이 주기적으로 공연케 되었으며 청춘파, 호화선, OK악극단등 국내 일
류급 흥행 단체들이 몰려 공연이 본격화되기 시작 하였는데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한국 극
단에서 일본어를 구사하며 연극을 공연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일들이 아닐 수 없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온양극장의 운영 상황은 많이 달라지기 시작 하였다. 8.15광복을 경축하는 갖가
지 대중 집회가 이곳 온양극장에서 연일 계속 되다시피 하였는데 당시 온양지방의 유일무이한 대중
집회소로서 붐비던 이곳 온양극장에서 좌익분자들이 재빨리 시민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우익 진영인 독립 촉성회가 이곳 온양극장에서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흥행물
이 등장될 리가 없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어서 극장관람에 굶주린 당시의 주민들에게는 퍽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무렵 당시 우익 진영단체인 독립 촉성회의 청년에서 소인극그룹을 창립하였다. 이 소
인극 그룹에서는 애국심과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의 연극을 시도하여 이주진, 허정, 엄석창, 강근식등
10여명이 모여 안중근의사, 김상옥열사 등의 애국심을 소재로 한 소인극들을 공연하여 미흡한 내용
16 |
아산타이딩
A-san of Tidings

16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