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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무이한 대중집회소로서 붐비던 이곳 온양극장에서 좌익분자들이 재빨리 시민대회를 개최 하
기도 하였고 이어서 우익 진영인 독립 촉성회가 이곳 온양극장에서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러
한 소용돌이 속에서 흥행물이 등장될 리가 없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어서 극장관람에 굶주
린 당시의 주민들에게는 퍽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무렵 당시 우익 진영단체인 독립 촉성회의
청년에서 소인극그룹을 창립하였다 이 소인극 그룹에서는 애국심과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의
연극을 시도하여 이주진 허정 엄석창 강근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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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모여 안중근의사 김상옥열사 등의
애국심을 소재로한 소인극들을 공연하여 미흡한 내용과 연기지만 많은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었다.
강근식의 각본과 장식 분장등으로 이루어진 소인극 안중근 의사 등이 공연될 때면 여러 가
지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너무 억눌려 살아왔던 터이겠지만 그 한풀이
를 하기 위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소인극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도중 관객들은 관람석에서
연극에 도취되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어서는 관객들이 있는가 하면 심한 관객은 무대
위로 뛰어올라 일본 경찰로 분장하고 연기하는 한국인 연기자의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는 진
풍경도 많았었다 이 무렵 소인극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노래 콩쿨대회도 소인극 못지 않은 대
단한 인기를 차지하였다 물론 일제 침략하에서 마음 놓고 우리의 노래를 불러보지 못한 한도
있었겠지만 노래 콩쿨대회가 열릴 때마다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었다 이러한
당시의 온양극장의 운영은 전에 일제하에서 일했던 종업원들의 손에 의해 자치 운영되었기 때
문에 수입은 없고 그저 알뜰한 봉사였었다 그러다가 온양에 미군이 진주하게 되자 주둔하는
미군들의 위안 공연을 위해 간간이 온양극장이 이들에게 빌려 지기도 했었다 미군들은 당시
의 온양극장 무대를 사용할 때마다 무대 바닥을 새로 깔고 또 조명시설도 특별하게 갖추어 놓
고 공연을 하였다
그 덕분에 온양 극장은 이 무렵 항상 깨끗한 시설을 유지 할 수가 있었다
경영주가 없는 온양극장이 대중 집회소로 또는 흥행장으로 요긴하게 이용되어 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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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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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난으로 말미암아 이 온양 극장은 폭격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리하여 천낙관 시설부터 온양극장이 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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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년 동안 얼키고 화제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이곳 일대는 명물로서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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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과 더불어 차츰 사회 질서가 확립되고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극장 시
설의 필요성이 차츰 커지기 시작 하였다 이 무렵에 이동 흥행장 당시 가설극장 이 등장하여
사방을 광목천으로 치고 노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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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상영하였고 당시의 충남차부 현재 금강여관 신
관자리 의 차고에서 틈틈이 영화를 상영한바 있었다 이 당시의 시네마 온양이란 것이 생겨
지금의 용화동방면 굴다리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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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의점 뒤 창고 제법 본격적인 흥행장 구실을 하게 되었
다 그후 동방회관의 건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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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상영과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국악단의 무대 공
바가 있다.
연이 이루어져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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