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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이야기
公州
(12)
장 길 수
__봉황중학교 교장
__공주향토문화연구회 회원
__공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위원
5. 유교의 터전과 땅이름
1) 향교와 땅이름
교동(校洞) 본래 공주군(公州郡) 남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그
부면(南部面)의 지역으로 향교가 있
이념이 중·근대를 통하여 교육의 바
으므로, 향굣골 또는 교촌(校村)이라
탕을 이루어왔다. 고려시대에는 중앙의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국자감과 동서학당, 지방의 향교가 교
따라, 교촌 일부를 갈라서 금정(錦
육을 이끌어 왔다. 조선시대에도 그 맥
町)이라 하여 공주면(읍)에 편입되었
을 이어 서울에 성균관·오부학당, 지
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
방에 향교 등의 관학이 교육의 중심이
하여 교동(校洞)으로 고쳐 부르고 있
었다. 향교는 한 읍에 한 개 정도뿐이
다. 생겻골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교
었기에 일반 서민들의 교육 혜택은 한
동이라 불리는 땅이름이 전국 도처
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사립학
에 많이 있는데 이는 향교가 있었던
교격인 서원과 서당이 도처에 세워지
동네라는 뜻이다.
게 되었다.
구향교골(舊鄕校-) 데처니고개(곰나
공주에는 향교가 교육의 주체로 최근
루에서 송산소로 넘어오는 고개) 북
세까지 활발하게 그 활동을 해왔으며,
서쪽 골짜기, 지아집뜸(지금의 국립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서원
공주박물관 건물 앞 광장 부근) 남서
으로는 명탄서원(월송동)과 충현서원(반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에 공주 향
포면 공암리) 등의 건물이 남아있으며,
교가 이곳에 있다가 인조 원년
서당은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이 거의 없
(1623)에 교동 현재의 장소로 옮겨
고, 서당골, 서당말이라는 땅이름으로
갔다고 한다. 구향교동(舊鄕校洞)이
그 흔적을 비교적 많이 남기고 있다.
라고도 한다.
JUL/AUGㆍ
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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