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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준
奇遵
<1492(성종 23년) ~ 1521(중종 1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이다. 1519년(중종 14)에 훈구세력이 조광조(趙光
祖) 등 신진 사림세력을 제거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잠시 아산에 유배되었던 일로 인해 아산(염치읍 서
원리)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응교 찬홍( 弘)의 아들이다. 자는 자
경(子敬), 호는 복재(復齋)·양덕(陽德)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
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정자·박사·저작·수찬·장령·시강관 등을 역임하였다. 훈구세력의
부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응교(應敎)로 재임하던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김식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죄가 가중되어 함경도 온
성(穩城)으로 옮겨졌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왔으나 1521년의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다시 유배
지로 가서 그곳에서 교살되었다. 1545년(인종 1)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민(文愍)이
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성 충곡서원, 고양 문봉서원에도 배향되었으며 여러 편의 시와 문집
으로《복재집》
《덕양일기》등을 남겼다.
[15] 김계양
金季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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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상산 김씨 13세(世)이며 상산 김씨 아산 지역 입향조(入鄕
祖)다. 공민왕·우왕 때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오르고 중대광 삼사우사(三司右使-
정2품) 상장군을 지낸 상산군(商山君) 득제(得濟)의 손자이고 참의(參議) 장( )의 4남 중 셋째 아들이다.
만호(萬戶-종4품)를 지낸 그는 아들 질( )이 밀양 박씨 좌익원종공신 천안 군수 자오(子晤)의 딸과 혼인
을 하게 되면서 아산에 내려와 자리 잡게 되었다. 상산 김씨가 처음에는 아산현 남면 성산(현재 염치읍 염
성리 염치초등학교 근처)에 살았으나 그의 4세손백환(百 )(장사랑공) 때 모두 영인면 상성리로 이주해서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묘는 실전되었다.
[16] 김구
金鉤
<1381(고려 우왕 7년) ~ 1462(세조 8년)>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문장공파(文長公派) 파조다. 자는 직중(直中), 호는
송정(松亭)·귀산(歸山)이며 대사헌 광수(光粹)의 아들이다. 대사성 윤상(尹祥)의 문인이며 1416년(태종
16)에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35년(세종 17)에 종학박사에 제수된 이래 한관(閒官)·사성 등을
거쳤다. 1448년(세종 30)에 상주목사가 되었다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임명되어 김문(金汶)과 함께
사서를 한글로 번역한《사서언해(四書諺解)》
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그 해에 궁궐 내의 불당 설립을 반대
하는 상소를 올렸고 사간(司諫)이 되었을 때 종친의 고신(告身-직첩)에 서명을 거부하여 좌천당하기도 하
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사성·부제학에 제수되었고 1454년(단종 2)에 예문제학이 되어 다시 내불
당(궁궐 안의 불당) 혁파 상소를 올렸다. 1455년(세조 1)에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1458년에는 이승소(李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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