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9페이지

159페이지 본문시작

세상에 대한 포부나 속된 욕망이 사라지고 자연과 함께 여유를 즐기는 노년 학자의 마음
이가환의 해박한 지식은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로 풍부했으며 특히 기억력은 천부적이
이 잘 드러나 있다. 이삼환은 성호의 자득과 구두지남(句讀指南)을 가지고 후학들을 양성하
었다. 한번 눈으로 본 사실은 평생 동안 절대로 잊지 않았다. 뛰어난 암기력 못지않게 폭넓
는 한편, 1786년에 「양학변(洋學辨)」을 지어 천주교를 비판하여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빠지
은 독서력도 그가 해박한 지식을 갖추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구경(九經)· 사서(四書)
지 않게 하였다. 그의 문집은 『소순산방장(少盾山房藏)』 8권과 『목재영어』 1권 등이 있다.
23사(史)부터 제자백가, 시(詩)·부(賦)·잡문(雜文)·총서(叢書)·패관(稗官)·상역(象譯)·산
률(算律)의 학문과 우의(牛醫)·마무(馬巫)의 설과 악창(惡瘡)·옹루(癰漏)의 처방까지 모든
(4)해박한지식인,이가환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여 전문가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깊게 알고 있었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자는 정조(庭藻)이며,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이다.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그의 해박한 지식은 정조도 감탄할 정도였다. 일례로 『대전통편(大
典通編)』을 편찬할 때 이가환은 정확한 증거를 들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정조가 우리
그는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이고 이용휴의 아들이며 서울 황화방(皇華坊)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7년 36세의 나이에 그는 증광시에 합격하여
나라 고사를 물을 때마다 그는 명확한 근거를 해박하게 들며 일사천리로 척척 대답했던 것이
관직에 나갔다. ‘문장개세(文章蓋世)’나 ‘문장관일세(文章冠一國)’로 평가받을 정도로 그
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해박한 지식에 탄복한 정조는 그를 정학사(貞學士)라고 불렀다.
의 문장은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그의 문장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정통하여 해박한 지식에
이가환은 서학에도 밝았다. 서학에 대해 이벽과 논쟁을 벌인 후 천주교 서적을 두루 섭렵
기반을 둔 실학적 글쓰기 방식의 전범을 보여준다.
하였다. 1790년경에 천주교 신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서학과 조선의 유교 문화 간에
문학에 대한 이가환의 감식안은 대단히 뛰어났다. 처음 본 당·송·원·명 작가의 시라도 어
충돌이 일어났다. 서학의 엄정한 규칙과 전교 방식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수용하기 어려움
느 시대에 지은 작품인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우리나라 시에 대해서도 그는 시풍을 정확하
이 있었으며, 특히 제사 금지는 조상을 숭상하는 전통적 윤리 문화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평
게 알고 있어서 누구도 그의 감식력을 속일 수가 없었다. 정약용도 허질(許瓆)이 한중(韓中)
등 사상은 조선 사회의 봉건 질서를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서학을 탄압하였
역대 시집에서 시를 뽑아 물어보아도 정확하게 맞혔다는 일화를 기록할 정도였다.
다. 정조 말기에 정치적 갈등이 치열하면서 노론 벽파들은 남인 시파에 속한 이가환을 서학
시를 신묘한 물건이라고 정의한 이가환은 문자가 모여 구절이 되고, 구절이 모여 문장이
의 교주라고 공격하였다. 정조가 승하하자 1801년에 노론 벽파는 사학(邪學)을 창립한 교
되므로 문장과 구절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다며 형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시
주라는 이유로 이가환을 체포하고 갖은 고문 끝에 처형하였다.
가 산문이 아닌 시가 되는 이유는 항상 문장이나 구절의 밖에 있다고 했다. 즉 시에 담긴 담
그의 문집은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금대유고(錦帶遺稿)』 등이 있다. 묘소는 고덕
박[淡]과 꾸밈없는 바탕[素]이다. 그는 담박함은 맛이 없고 꾸밈없는 바탕은 색깔이 없지만
면 상장리에 있었지만 1987년에 후손들이 강원도로 이장해 갔다.
자득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그의 산문은 성호 이익, 혜환 이용휴 등 성호학파의 글쓰기
3)한말고문창작의거벽(巨擘),이남규
방식에 기반을 두고 고문가적 글쓰기를 추구하였다. 역사 인물들을 중요하게 다룬 그는 충
의를 실천한 인물을 발굴하고, 사실 행적에 근거한 고증적인 태도로 기록하였다.
그는 문학의 교화적 기능을 중시하여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잘못된 시속과 관료의 부
이남규(李南珪)의 자는 원팔(元八), 호는 수당(修堂)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1855
패상을 비판하였다. 실학적인 관점으로 당시 현실을 적확하게 직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년 서울 미동에서 태어난 그는 1875년에 감시에 합격하였고 1882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
데 그치지 않고 해결책도 제시하는 적극적인 글쓰기를 실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분의 귀
였다. 이듬해에는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1894년에는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천을 초월하여 현실에 필요한 실학에 모범적인 인재상을 문학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줌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시조카인 이준용이 명성왕후를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고종
으로써 그는 교화의 효용성을 거두고자 하였다.
이 이들의 요구에 응하며 명성왕후를 폐위하려고 들자 이남규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 수 없
3.선비의고장,예산
159
158
내포의뿌리예산학

159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