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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성원경(成元慶)(1891~1975)
창녕 성씨 위패가 봉안돼 있는 창의사 (신양면 귀곡리)
성희옹의 묘에서 바라본 창의사
본관은창녕(昌寧)호는만정(晩汀)이며조선중기의성리학자(性理學者)수침(守琛)의14
세손이고혼(渾)의13세손이다.
출생은아산군도고면농은리(牙山郡道高面農隱里)이고예산군신암면계촌리(桂村里)에
서성장하였으며,그후예산면예산리(禮山面禮山里)에근거를두게된다.
서울에서중앙학교(中央學校)(現中央中高校)를마치고일본중앙대학정경학부(中央大學
政經學部)를 졸업하였다. 그 당시 부(父) 낙규(樂奎)는 호서은행(湖西銀行) 발기인취체역
(發起人取締役)(1913~1929), 숙부 낙헌(樂憲)은 발기인 전무취체역(發起人 專務取締役)
(1913~1931)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호서은행 천안지점장을 맡게 되고 그 후 본점이 천안으로 옮기자 예산
지점장을계속맡게되며1931년호서은행이서울의한일은행(韓一銀行)과합병(合倂)하여
동일은행(東一銀行)이 된 후에는 1934년경 숙부 성낙헌 대신 동일은행 상무취체역으로 선
임된다.
해방전까지각신문사창간(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발기인)에참여하고금광(金
鑛)에대하여는평생힘을쏟았다.
해방 후에는 예산에서 반탁투쟁위원회(反託鬪爭委員會)인 독립촉성국민회 (獨立促成國
民會)를 이끌게 되고 농지개발영단(農地開發營團) 이사장(理事長)(1946~1948년)을 맡게
되며 1952년 예당수리조합장(禮唐水利組合長)을 맡고 1954년 제3대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58년부정선거로4대에는낙선했으나1960년4.19혁명으로5대국회로진출하게되지만
1961년5.16군사혁명으로국회는해산되어정계를은퇴한다.
묘는아산시도고면와산리(瓦山里)지새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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