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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해서 이듬해인 1946년 제1회 3.1절 기념 연극공연대회에 출품했다. 이후에도‘논개’
, ‘위대한 사랑’
등 연극과 시 창작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다가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8년 8월에 단신 월북했다.
부인도 남희·용희 두 딸과 1951년에 북으로 갔으며 둘째 딸 혜령은 경기도에 살던 할머니에게 맡겨져서
지금까지 남한에 살고 있다고 한다.
월북 후에 북한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동하며 1954년에 독일에 다녀왔다. <조영출 시선집>(1954)을 간행
했고 1964년에는 <조영출 희곡집>을 출간했다. 1956년 10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1957년 영
화문학(시나리오)창작사 초대 주필, 민족예술극장 총장이 되었고 이른바 민족가극‘춘향전’
을 썼다. 1960
년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1962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66년 평양가무단 단장,
1977년 평양학생소년예술단 단장, 1982년 조선중국친선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문예계 고위
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 공로로 1973년에 국기훈장 1급 김일성훈장, 1982년 4월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받았다. 1993년 5월 8일 평양에서 사망했고 평양 외곽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월북 작가인 그의 작품은 오랜 동안 금기가 되었다. 1988년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解禁)된 뒤에 공
개적으로 이름을 거론할 수 있었고 1992년부터 연구와 출판이 허용되었다. 그 후 서귀포에 노래비(1997),
건봉사에 시비(2001), 예산 덕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2003년에는 딸(혜령)이 주도해서 <조명암 시전집>
이 발간되었다.
<조명암 사진과 조명암 시전집 표지>
[20] 최재유
崔在裕
<1906 ~ ?>
보건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1929년에 세브란스의과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부터 세브란스의과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보건부 차관을 거쳐 보건부 장관(1952.2~1955. 2)에 임명되었다. 보건부가
보건사회부로 바뀐 뒤에도 그가 계속 장관직(1955.2~1956.5)을 이었다. 이후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과 대한적십자사 부총재(1956년)로 지내다가
제6대 문교부 장관(1957.11.27~1960.4.27)을 역임하였다.
<최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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