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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가올라가야비가온다고믿었다.불은끄지않고밤새타도록내버려두었다.
여자들이지내는기우제는마을위에있는계곡에서지냈다.마을여자들이집에있는키
를 모두 가지고 나와 풍물을 치면서 올라가 키를 닦았다. 키가 깨끗해지기도 하였지만, 닦
는 소리가 비 오는 소리여서 키를 닦았다. 이때 여자들은 몸도 씻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접
근할수없었다.
시루뫼마을의북쪽,현재교회있는곳에큰서낭댕이가있었고신수로는큰팥배나무가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에는 돌 세 덩어리씩을 던졌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 놓기도 하였다.
1950년대까지 마을에 마마(천연두)가 들어오면, 집집마다 걸립을 하여 제를 지내고 짚으로
말을만들어마을길의남쪽과북쪽에놓았다.
시루뫼 마을에서는 1950년대 초까지 두레로 논을 맸다. 큰 마을기와 영기를 걸어놓고 일
을 했으며 풍물패가 흥을 돋우었다. 풍물패에는 새납을 잘 부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큰마당집 마당에서 놀았는데 무동을 3층으로 태우고 서로 옮겨가며 춤을 추었다. 최
고의 춤꾼은 지흥갑 씨였고 별명이 꽃나비였다. 이복남의 꽹과리, 밀양박씨의 양장구도 유
명하였다.
시루뫼 마을은 배 형국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마을이 배의 몸이고 주렴산이 뱃머리이다.
그래서 예부터 시루뫼 마을에 샘을 파면 배에 물이 들어오는 형국이라 안된다는 금기가 있
었다. 이런 금기는 1930년대까지 철저히 지켜져, 마을 사람들은 개울물을 길어다 먹었고 날
이가물어개울물이떨어지거나홍수가나흙탕물이되면성너머샘에서길어다먹었다.마
을에 처음으로 샘이 생긴 것은 1930년대였다. 1950년대까지 마을의 샘(개인 샘)은 단 4곳이
었고공동샘은없었다.
시루뫼 마을 앞에는 백합이 많았다. 백합은 웅천천과 바닷물이 합쳐지기 때문에 생겨나
는 것으로 맛도 좋았고 값도 비쌌다. 백합은 그랭이라고 하는 것으로 모래를 훑어 잡았다.
백합의 종패는 그랭이에 모기장을 씌워 잡았는데 아주 비싼 값으로 팔려 큰 소득원이 되었
다.전라도에서사다가양식하였다.
시루뫼 마을은 웅천천의 하구로, 서천군 서면 개야리와 이웃한다. 웅천천의 하구에 개야
리 사람들이 덤장을 맸었는데 1952년 흉년에 잡은 고기가 팔리지 않아 경영이 어려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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