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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이름 높고 소중한 명승고적들
1.
명승
산천
? ①
설화산
이 산은 온양 온천에서 동으로
10
리 상거해 보이는 산인데 산정에는 백제의 성지가 완연히
있고 그 동북으로는 배방산이 솟아 있는데 역시 백제의 성지가 있으니 백제 당시 온양을 방
비함에 있어서 그 중요 역할을 한 듯하다 북에 곡교천이 흐르고 그 좌우평야에는 전답이 개
척되어 주민의 식량을 제공한다 이 산은 기이하게 솟아오른 모습에 맑고 빼어난 산세로 이곳
의 영산으로 유명하다 이 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쇠일 금곡 의 맹씨가 서쪽으로는 외암이
씨가 세거하고 있다.
? ②
곡교천
온양읍 주변에는 이렇다 할 만한 내나 강은 없지만 온양 온천의 북쪽으로 감돌아 흐르는 곡
교천이 있는데 명승지라기 보다 수량이 풍부하여 농업용수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온천
온양 온천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권
19
에 의하면 백제시대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고 한다 그러기에 고을 이름을 줄곧 탕정 온수 온창 온천 등 온천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만
불리어 온 것으로 본다 옛 온양군은 원래 백제의 탕정군이었는데 고려 초에 이르러 이름을
온수군으로 고쳤다 조선 때에는 태종
14
년에 온창
, 16
년에 온수로 고쳐 불리어오다가 세종
14 (1432 )
년 에 임금이 온천에 거동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옛 기록에 온천은 좌군서
칠리허에 있는데 병을 고치는데 효험이 있다 조선의 세종 그리고 세조가 일찍이 순행하여 유
욕했다 그 때 머무른 어실이 있다 고 밝히고 있다 두 임금 외에도 숙종 영조 정조 등 많은
임금이 자주 유욕하였다 그 유적으로는 세조 때에 이 온천 옆에서 냉천이 발견되어 당시 상
서의 발로이다 하여 팔도에서 하표를 받은 일이 있는데 그 기록을 담은 주역신정비와 영조 35
(1760 )
년 에 왕이 온궁에 왔을 때에 왕세자 사도세자 가 행계하여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을
기념하기 위해 왕이 군수 윤염에게 명하여 사대에
3
데 이곳에 정조
19 (1795 )
년 에 세운 어제영괴대비 등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실로 쓰이던 온
궁은 원래 신정관 현 관광호텔온양 터에 있었으나
, 1904
년 일본의 경제침탈에 의하여 철거되
었다고 한다 현종의 온천 임행에 관련된 다음의
가 전해진다
? “
온천이 중흥하니 온천을 생각하고 행전의 감회는 옛 생각이 깊었구려 옛날의 누대 임금
모두 다 오시어서 이곳에서 주무시니 얼마나 다행한다 옛날 일이 더욱 마음에 새롭다 대나무
로 병풍 침은 옛부터 전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옛 생각 새롭구려 근본 가지는 오히려
온전속에 머무는데 그 때 일 생각하니 눈물이 앞서는구나.”
? “
행재소의 문 앞에 선 작은 비석은 지난 날 행임하던 때의 추억만 새로워라 이제 옛일 생
각하여 영각을 명하오니 이 사실은 어제 시에도 자세합니다.
7
이름 높고 소중한 명승고적들
1.
명승
산천
? ①
설화산
이 산은 온양 온천에서 동으로
10
리 상거해 보이는 산인데 산정에는 백제의 성지가 완연히
있고 그 동북으로는 배방산이 솟아 있는데 역시 백제의 성지가 있으니 백제 당시 온양을 방
비함에 있어서 그 중요 역할을 한 듯하다 북에 곡교천이 흐르고 그 좌우평야에는 전답이 개
척되어 주민의 식량을 제공한다 이 산은 기이하게 솟아오른 모습에 맑고 빼어난 산세로 이곳
의 영산으로 유명하다 이 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쇠일 금곡 의 맹씨가 서쪽으로는 외암이
씨가 세거하고 있다.
? ②
곡교천
온양읍 주변에는 이렇다 할 만한 내나 강은 없지만 온양 온천의 북쪽으로 감돌아 흐르는 곡
교천이 있는데 명승지라기 보다 수량이 풍부하여 농업용수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온천
온양 온천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권
19
에 의하면 백제시대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고 한다 그러기에 고을 이름을 줄곧 탕정 온수 온창 온천 등 온천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만
불리어 온 것으로 본다 옛 온양군은 원래 백제의 탕정군이었는데 고려 초에 이르러 이름을
온수군으로 고쳤다 조선 때에는 태종
14
년에 온창
, 16
년에 온수로 고쳐 불리어오다가 세종
14 (1432 )
년 에 임금이 온천에 거동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옛 기록에 온천은 좌군서
칠리허에 있는데 병을 고치는데 효험이 있다 조선의 세종 그리고 세조가 일찍이 순행하여 유
욕했다 그 때 머무른 어실이 있다 고 밝히고 있다 두 임금 외에도 숙종 영조 정조 등 많은
임금이 자주 유욕하였다 그 유적으로는 세조 때에 이 온천 옆에서 냉천이 발견되어 당시 상
서의 발로이다 하여 팔도에서 하표를 받은 일이 있는데 그 기록을 담은 주역신정비와 영조 35
(1760 )
년 에 왕이 온궁에 왔을 때에 왕세자 사도세자 가 행계하여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을
기념하기 위해 왕이 군수 윤염에게 명하여 사대에
3
데 이곳에 정조
19 (1795 )
년 에 세운 어제영괴대비 등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실로 쓰이던 온
궁은 원래 신정관 현 관광호텔온양 터에 있었으나
, 1904
년 일본의 경제침탈에 의하여 철거되
었다고 한다 현종의 온천 임행에 관련된 다음의
가 전해진다
? “
온천이 중흥하니 온천을 생각하고 행전의 감회는 옛 생각이 깊었구려 옛날의 누대 임금
모두 다 오시어서 이곳에서 주무시니 얼마나 다행한다 옛날 일이 더욱 마음에 새롭다 대나무
로 병풍 침은 옛부터 전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옛 생각 새롭구려 근본 가지는 오히려
온전속에 머무는데 그 때 일 생각하니 눈물이 앞서는구나.”
? “
행재소의 문 앞에 선 작은 비석은 지난 날 행임하던 때의 추억만 새로워라 이제 옛일 생
각하여 영각을 명하오니 이 사실은 어제 시에도 자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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