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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1955년에는 당시 매출액 기준 국내 10대 기업에 속하는 비료공장 북삼화학공사(北三化學公社,
당시 강원도 삼척 소재)의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 충남 제11(아산군)지구당 위원
장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해 11월에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1963.12.17~1967.6.30) 총선에 아
산군 지역의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정당 강필선, 민주당 성기선, 자유민주당 서용길, 국민의 당
이민우 등을 누르고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그 뒤에 농어촌개발공사(현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일본 산토리사와 합작으로 1968년 설립한 한국산토리
주식회사 사장을 3년간 역임했다(1968.1.1~1970.12.31) 이즈음에 그는 온양을 떠나 서울에서 거주했다.
그해(1968년)에 이 회사가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1973년 7월에
해태그룹에 인수되었다. 한국산토리(주) 사장 이후 그의 자세한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만년에 여
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 이종무
李種武
<1916. 9. 10 ~ 2003. 5. 26)
아산 출신의 근·현대 서양화가다. 덕수 이씨로 온양에서 태어났다. 1935년부터 2년간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高羲東, 1886~1965)에게 사사한 뒤 1936년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부터 천단화
(川端畵)학교에서 수학했다. 1941년에는 동경동방미술학원을 졸업하고 그 때부터 동경미술가협회 및 동
광회전 등에 출품하며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해서 1946년 동아백화점에서 개최한 <양
화6인전> 등에 출품을 함으로서 화단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대한미술협회 상임이사,
1949년 미술문화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1952년에는 대한미협전에 출품하고 제임스 A 미취너상을 수상했
다. 1952년부터 3년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했고 1955년부터 국전에서 계속 특선을 차지하고 같은
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서 취임해서 1966년 퇴직할 때까지 대학미술 교육에 진력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80~1983)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80년에는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한국현대미술관 건립에 기여했다.
<이종무 화백>
<당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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