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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의간척과개척 ?153
부족하면 도비산(4㎞)까지 가서 돌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오전에 2번, 오후에 3
번 돌을 짊어지고 왕복했다. 점심은 쌀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었다. 도비산의
꼭대기까지는 5㎞가 넘지만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했기에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노동에 임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니집 내집으로 구분된 것은 아니지만 훗
날자신의집이될수있었기에고생이남달랐다고한다.
개척단 초가에는 삽만이 있었을 뿐이다. 강원도에 만들어졌던 국토건설단이
1963년에 해체되면서 그들의 물건을 인수받았다. 손수레, 양은제 그릇, 큰 통
등을인수받았다.건설단이라쓰인밥그릇이지금도보관되어있다.지름이15㎝,
둘레가 48㎝이고, 높이가 8㎝ 크기로 겉보리밥을 담아 먹었다. 허허벌판에 건
립되었기에 마을 주변에는 녹화를 위해 대규모로 포푸라 나무를 심었다. 공동
생활의 적적함을 극복하기 위해 개척단원들은 63~64년도에 5차례 연극을 하며
거친삶을위로하기도했다.
이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정착하도록 하기 위해 1963년에는 개척단원과 서울
보호소에 있던 여자수용자들과 혼인을 주선했다. 1964년 9월 20일에 125쌍이
서산에서 혼인했고, 1965년에는 225쌍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혼인했다. 혼인을
하기 위해 여자들이 서산으로 내려와 건물 안에 있으면 남자들이 밖에서 지나
가고 여자들이 혼인하고 싶은 남자를 선택했다. 두 사람의 의견일치를 보게 되
면 혼인을 주선했다. 혼인식은 공동으로 거행했다. 제보자 김인 씨는 고향인 부
산에서부인을데려왔다.
당시 보호소에 있던 여자들은 성매매를 하던 이들로부터 캠핑 나왔다가 강제
로 구인된 여대생 등으로 다양한 성향이었기에 혼인 후에 자유를 얻게 되자 모
두 이곳을 떠났다. 수용인 신분이었기에 혼인은 강제적이었고, 큰 의미가 없었
던것이다.
혼인한 사람들이나 간부들은 별도의 집에서 거주했다. 집은 12평의 규모로
지어졌고,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칸에 큰방과 작은방을 만들고, 방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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