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155페이지 본문시작

[14] 이기영
李箕永
<1895 ~ 1984. 8. 9>
아산 출신의 문학가다. 배방면 회룡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호는 민촌
(民村)이다.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다가 1907년에 천안에 있는 사립 영진학교(뒤
에 천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15세 때인 1909년에 결혼을 했다. 1910년에 졸업한 후 잠시
집에 머물다가 여러 해 동안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유랑했다. 1917년부터 이듬해까지 논산 영화여
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다시 호서은행 천안지점에서 약 3년간 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苦學)으로 동경정칙영어학교를 고학으로 다녔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 때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 특히 M.
고리키의 문학을 접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어 귀국한 뒤부터 문학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24년《개벽》
현상공모에 단편소설‘오빠의 비밀편지’
가 당선되어 문단에 입문했다. 이듬해에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조명희(趙明熙)의 소개로《조선지광》
에 취직했고 이때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가동맹)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31년 일제의 카프에 대한 제1차 검거로 그도 구속되었다가 이
듬해 초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며 그 뒤에 더욱 활발한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서화〉이후 그의 대표작인 장편 농민소설〈고향〉
이 이 때 나오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90여
편의 단편소설과 희곡 3편, 평론 40여 편에 14권의 단행본을 내는 등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그
러나 일제의 감시와 억압 때문에 1944년에는 강원도 철원으로 숨어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창립에 주도했고 그 해 말 월북해서 북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월북 후에도 활발한 문학 활동을 통해〈땅〉
〈두만강〉
〈조국〉등 많은 작품을 썼고 90세가 된 1984년에
병환으로 세상을 떴다.
[15] 이마동
李馬銅
<1906. 5. 1 ~ 1981>
아산 출신의 서양화가다. 호는 청구(靑駒)이다. 영인면 아산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해서 아산공립보
통학교(현 영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
가인 고희동(高羲東)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1932년에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이미 1928년에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으며 1932년에는 특선에 당선되
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도 그림에 열중하여 사실주의 경향으로 정물과
인물을 주로 그렸다. 1934년에는 주류의 보수적 경향에 대항하여 개성적이고 민족적인 성향의 사람들과
‘목일회(牧日會-뒤에 목시회)’설립에 참여했다. 또한 선전 출품을 거부하고 목시회 동인전과 민족적 경
향의 서화협회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1939년부터 보성고등학교에 재직(1951년까지)하면서 8·15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에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심사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6.25전
154

15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