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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총재에 취임하였으나 1972년 유신체제
등장으로 해산되었다.
그 후 민주화 운동에 나서서‘민주회복국
민회의’ 결성(1973), ‘명동성당사건’
(1976), 민주구국선언(1977), 3·1민주선
언(1978년) 등에 참여하였다. 1973년 민청
학련 사건, 그리고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YMCA 위장결혼사건 등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으며 1986년에는 민
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94세 되던 1990년에 노환으로 종로구 안
국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촌문화상
을 받았고 저서로《구국의 가시밭길》
이라
<윤보선 대통령의 묘>
는 자서전이 있다.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
있는 그의 생가는 1907년에 부친이 새로 지은 것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는 아
산시 음봉면 동천리 선산에 부인 공덕귀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13] 윤영선
尹永善
<1896. 12. 24 ~ 1988. 2. 6>
장관을 지낸 관료이자 사회활동가이다. 호는 오당(梧堂)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대한제국의 군부대
신을 지낸 웅렬(雄烈, 1840~1911)의 손자이고 개화운동가였으며 일제강점기 종교·교육운동가이자 친일
인사였던 치호(致昊, 1865~1945)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소주(蘇州) 출신의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6)이다. 부인은 민연희(閔連嬉, 1895~1950), 김명주(金明珠, 1906~1981) 등 둘이다.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2년에 오하이오 주립대 축산과를 나왔다.
1945년 고려제약(高麗製藥)을 창설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제3대 농림부장관(1950.1.21~11.22)에 발탁되었다. 농림부 장관에 취임할 당시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기 때문에 지주로부터 농지를 수매하고 그 토지를 농민 소작인에게 분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퇴임 후에는 주로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였다. 4H클럽 활동에 힘쓰며 4H클럽 중앙위원을 거쳐 중앙위원
회 회장·고문으로 일하였으며 1954년에는 고려보험(현 쌍용화재해상보험)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서
울로터리클럽 회장(1957~1958), YMCA 총무(1958~1959)를 역임하였다. 1960년 이후 보이스카우트활
동에 노력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총재 비서실장과 학교법인 송도학원(松都學園) 이사장(1952~1982) 등을
역임하였다.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영구(英求)·승구(勝求) 등 아들 둘을 두었다. 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가 있는 아산시 둔포면 석곡리 해평윤씨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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