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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서산천수만의옛모습
하면 토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노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아 이곳으
로옮겨왔다고하는데,그권유를거부할수있는권리는주어지지않았었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들은 1961년 11월 14일에 서울에서 내려온 이들로,
단장 민정식 씨가 서울에서 모아서 내려온 25명이었다. 민정식 씨는 서울 홍제
동에서 개인 사업을 하던 이로, 2대 대통령인 윤보선과 친근한 사람이었다라
고 기억한다. 그 후 여러 차례 구분되어 사람들이 모집되어 왔다. 제보자 정영
철 씨와 김인 씨는 이곳에 들어온 2기생으로 부산에서 잡혀왔다. 1962년 2월 3
일에 부산에서 부랑아 생활을 하던 중 붙잡혔다. 당시 100명이 잡혔는데, 해병
대가 총을 겨누며 부랑아를 제압했다. 안서면 쏜다는 엄포에 놀라서 붙잡혔다
고 한다. 군용트럭에 실려서 용두산 공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이유 불문하
고 맞았는데, 부랑아를 길들이기 위해 무조건 때린 것이다. 이곳에서 희망원으
로 옮겨졌는데 그 당시 용두산공원 아래의 냇물이 빨갛게 될 정도로 구타가 심
했다고 기억한다. 일주일 정도를 방에 감금했는데, 200여명이 모이자 다시 버
스에 태워 어디론가 옮겨졌다. 당시 버스에는 커튼을 쳐서 자신들이 어디로 가
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남 장흥군 관산면 삼산리로 옮겨졌다.
이곳도 모월리와 달리 간척을 하던 곳으로, 당가를 매고 흙을 담아서 바다를 막
고 있었다. 2월에 도착해서 1962년 8월 20일에 장흥을 떠나기까지 작업에 동원
되었다. 땅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50명을 서산으로 옮겼다. 그 후에
는 서울역 지게꾼과 비렁뱅이[거지], 대전의 넝마군 등이 3기생으로 들어 왔으
며,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추가적으로 토지를 받을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이곳으
로 모였다. 이들은 모두 강제 수용되어 자유없이 강제노역을 했다. 1966년 9월
강제수용생활이끝날때까지모두1,771명이공동수용되어있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막사를 지을 때는 미8군에서 목재를 주었다. 단체합숙소는
창고처럼 만들고 마루를 놓아서 40~50명 정도가 생활했다. 수용생활은 군대와
마찬가지였다. 제식훈련을 받고, 군가식 개척단가(開拓團歌)를 부르며 작업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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