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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윤보선
尹潽善
<1897.8.26 ~ 1990.7.18>
아산 출신의 정치인이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다. 둔포 신항리 새말에서
출생했고 해평(海平) 윤씨 19세로 아산 지역 입향조인 득실(得實)의 현손이고
취동(取東)의 증손자이다. 아버지 윤치소(尹致昭,1871~1944)와 어머니 이범
숙(李範淑,?~1969)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내는 공덕귀(孔
德貴,1911~1997)이다.
아산공립보통학교(현재 영인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0세 때 서울로 갔다.
1912년 일본 도쿄로 가서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세이
소쿠[正則] 영어학교로 옮겼지만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21세
때 여운형을 따라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신규식·이시영·이승만 등을 만나
<윤보선>
함께 활동하였다. 이때 신규식이 지어 준 아호가 해위(海葦)이다. 임시 의정원
의 최연소 의원이 되었던 그는 선배들의 권유로 1921년에 영국으로 가서 글래스고·우드브룩·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에든버러대학에서 고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부친의 강권으로 2년간 유럽을 여행
하고 1932년에 귀국한 뒤 해방될 때까지 서울 안국동 집에서 은둔했다.
큰할아버지 윤웅렬이나 아버지 윤치소, 당숙 윤치호 등과 달리 친일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는
해방을 맞자 바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 민중
일보사 사장,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48년 5·10 총선에 아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
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 상공부 장관(1949)에 임명됐으나 갈등으로 중도
사퇴하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 이후 1954년 제3대 민의원(종로갑, 민주국민
당), 같은 해 민주당 중앙위원,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8~60년 제4·5대 민의원(종로갑, 민
주당),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해 8월 12일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내각제 체제에서 실권이 없는 대통령이었고 특히 장면 총리 중심의 신파와 갈등이 빈발하여
결국 민주당 구파를 중심으로 신민당을 창당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헌정이 무너진 뒤에도 대통
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에 사임하였다. 그는 정변에 적극 대응하지 않아서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정변세력의 계엄령 추인과 정변 지지 선언 요구, 그리고 미국측의 정
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 요구 등을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 맞서 1963년에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박
정희에게 15만 표 차로 패했다. 그해 11월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일협정
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며 1965년 5월 민주당과 통합한 민중당(民衆黨)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협정이
체결되자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이어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 이듬해에 따로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다가 다음해인 1967년에 민중당과 통합해서 창당한 신민당(新民黨)의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
었다. 그 해에 제6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다시 박정희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
여 신민당의 후보로 김대중(金大中)이 선출되자 이에 반발하여 1971년 1월에 다시 국민당(國民黨)을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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