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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추사체의창시자,김정희
예가를 넘어선 독자적인 경지였다.
추사체의 특징은 점획의 다변성에 따른 생동감이 넘치는 결구, 호획(弧劃)의 두드러진
김정희(金正喜)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등이며, 본
강조, 예서 중에 특정 획을 도출시키고 있는 점, 가로 획의 반복과 통일성을 들 수 있다.
관은 경주이다. 1786년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판서 김노경(金魯敬)이다.
현재 그의 서화 작품이 다수 전해오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대흥사의 현판,
1809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그는 부친이 동지겸사은사부사로서 연경에 갈 때 수행원으로 사
이상적에게 그려준 등을 들 수 있다. 고택이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신 행렬에 참여했다. 북경에 가서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 청나라 학자들과 만나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당시 연경에는 고증학풍이 발달했는데 옹방강은 금석학의 대가였
2.예산을빛낸문장가
다. 그의 학문에 감명을 받은 김정희는 사제간의 연을 맺었다. 연경에 머문 기간에 짧았지만
이들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김정희는 청대 고증학 중심의 금석학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이다.
1)일기문학의대가,조극선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김정희는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하며 금석학에 몰두하였다. 그
는 서울 인근 지역 답사를 통해 금석 자료를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동안 북한산에 있
던 고비(古碑)를 답사하여 글씨를 판독하여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도 그런 과정 속
조극선은 7살 때부터 옛 사람의 책을 읽었고 시문을 익혔다. 1609년 그는 15세의 나이로
에 얻은 중요한 결과였다. 『예단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과 『진흥이비고(眞興二碑
이명준(李命俊)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당시에 이명준은 덕산현감으로 내려와서 아이
考)』 등의 저술은 그가 고증학을 기반으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한 금석학의 대가임을 말
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었다. 이명준의 문하에 나가 학문을 닦은 조극선은 일록(日錄)에 뜻
해준다.
을 두어 하루에 겪은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조극선이 이명준에게 받은 학문적 영향은
1819년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충청도 암행어사,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
매우 컸다. 『인재일록(忍齋日錄)』의 첫 번째 일기를 보면 이명준에게 배우던 날을 상세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에 그는 제주도로 유배 가서 9년
기록했다. 조극선의 이명준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동안 적소에서 지냈다. 1848년에 석방되어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1851년에 현종의 묘천 문
그러나 이명준은 아우 이경준이 역모에 연루되면서 화를 당해 영덕으로 유배 갔다. 조극
제로 다시 북청으로 유배 가서 이듬해 석방되었다. 김정희는 만년에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선은 1616년에 유배지로 스승을 찾아가 뵈었다. 자신이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이명
한 것이다.
준은 조극선을 박지계와 조익에게 소개하여 찾아가 배우기를 권유하였다. 1618년 24살 때
그는 실학자로서 경학(經學), 사학(史學), 시문(詩文), 금석문(金石文), 고고(考古), 서화
조극선은 잠야 박지계를 찾아뵈었으며, 그해 11월 2일에는 포저 조익을 찾아뵈었다. 조극선
(書畵) 등 각 분야에 뛰어났다. 특히 서예는 초서(草書) · 해서(楷書) · 전서(篆書) · 예서(隷
은 이때부터 두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는 데 정진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자기 생활의 지
書)에 능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을 정도로 독창적인 경지를 도달했는데 그
침으로 삼았다.
의 서체를 추사체(秋史體)라고 한다.
인조반정 후 이조(吏曹)에서 말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선발할 때 조익의 추천으로 조
김정희는 끊임없이 수련하고 서체에 대한 창신을 추구하여 의경(意境), 자체(字體), 결구
극선은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조극선은 젊은 나이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없
(結構), 장법(章法) 등이 다양하게 변화하고 개성이 넘치는 서체를 구현하였다. 그의 서예관
으며, 부모를 떠나 벼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박지계와
은 첩학(帖學)을 버리고 북비(北碑)로 나가는 청대의 서예관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글씨가
조익 등이 벼슬에 나가기를 권유하므로 그는 마지못해 조정에 들어가서 제생들을 가르쳤다.
예리하고 힘차며, 고졸(古拙)함의 미학을 추구하며 역동적인 개성미를 창출한 것은 청대 서
1626년에는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며, 1628년 공조좌랑에 올라서는 누적된 폐단 20여 항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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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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