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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양준호
梁濬鎬
<1926. 1. 11 ~ 2004. 3. 18>
아산 지역의 기업인·문화예술인이다. 1926년 천안읍 읍내리에서 출생했고 얼마 뒤 공주로 이사했다.
1932년에 공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홍성·강경을 거쳐 아산 송악면의 송남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
다. 1942년에 공주중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에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곧 공주도립병원 약제과
에 들어갔다. 1947년에 공주여자사범학교 교사가 되었고 이듬해부터는 공주사범대학 화학과의 강사를 겸
직하기도 했다.
1950년 1월에 온양에서 경남약국을 열었는데 바로 6.25전쟁이 일어나서 가족이 송악 강당골 등지로 피
난한 사이에 약국은 모두 불타버렸다. 그도 1952년 4월에 제2국민병으로 논산 훈련소에 들어갔다가 폐결
핵으로 인해 3개월 만에 제대했다. 이때 그는 질병 치료를 위한 의약품 개발에 더욱 뜻을 두게 되었다.
1953년에 경남제약소를 설립한 뒤 이듬해인 1954년에 PM안고(眼膏)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PM연고(軟
膏), 감기약 PM산(散), 무좀약 PM정, 위장약 네오마겐 등을 출시했다. 마침내 1957년 6월에 경남제약(京
南製藥)을 온양읍 온천리(현 온천1동) 86번지에 공식 창립하여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1976년에 온천리 73번지 일대에 새로 공장을 세우고 법인을 설립해서 경남제약주식회
사로 성장하면서 전국 각지에 대리점을 개설하게 되었다. 특히 어린이 영양제‘소아리진’
(1981년)에 이어
1983년에 비타민C 제품‘레모나’
를 출시하면서 경남제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제약회사의 하나로 비약
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온양 도심 확대에 따라 1992년에 신창면 읍내리 학성산 기슭에 공장을 세워 이전하면서 온천리
시대를 마감하고 이듬해에 동생 양인호에게 대표이사직을 물려준 뒤 그도 경남제약 경영 일선에서 물러
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성실한 납세와 근로자들의 복지 향상에 힘을 쏟아 대통령 표창 2회, 장관
표창 6회 등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으며 1964년에 본인의 본적을 공주에서 온양으로 옮겨서 명실상부하
게 온양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역사회의 황폐하다시피 한 문화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1974년에 일요화가회를 만들어 평생
동안 거의 매년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회사 내에 관현악단을 만들고 지휘를 맡아 직원들과 함
께 호흡하면서 지역사회 행사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민간주도의 지역사회 기관
단체장 모임인 충무회(忠武會)를 설립하고 14년 간 회장을 맡아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87년
부터 7년 동안 천안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대한주부클럽의‘훌륭한 아버지상’
도 받았고 문단에도 나와서 1997년에 한국수필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기부와 선행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그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것은 빵모자(꼭지 베레모)와 바이올린뿐
만 아니라, 헤진 바지와 낡은 구두이기도 할 만큼 검박하게 생활해 온 그는 지역의 각계 사람들에게 신뢰
와 존경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설립한 경남제약이 2003년 9월에 녹십자 상아제약에 합병되었다. 그도 이듬해에 78년
간의 아름다운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부인 박진규(朴辰圭)씨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천
안공원묘지에 있다. 2004년 7월에 재단법인 양준호 장학회(이사장 양미을)가 설립되어 지역인재육성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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