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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년(중종9)11월12일(경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고려사(高麗史)》를 강하다가‘최치원(崔致遠)을 묘
181)
정(廟庭)
에종사(從祀)케하셨다.’는말에이르러,김구가아뢰기를,
“최치원은 동방 문헌(文獻)의 우두머리이므로 묘정에 종사했지마는, 그러나
도학(道學)을 정밀(精密)히 연구한 사람은 아닙니다. 정몽주(鄭夢周)같은 이
는 젊을 때부터 도학에 마음을 둔 까닭으로, 일찍이 교관(敎官)이 되어 무릇
182)
강론한 바가 뛰어나서 한 시대에서 모두 우원(迂遠)
하다고 여겼으나, 뒤
에 중국의 주해(注解)가 나오게 되자 정몽주의 말과 서로 꼭 맞았기 때문에
한 시대에서 추숭(推崇)하여 문학의 종장(宗匠)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을 문묘(文廟)에 종사시킨다면 동방의 문교가 또한 권려(勸勵)됨이
있을것입니다.”
하였다.
◎1515년(중종10)2월16일(갑진)
장순손을 우찬성으로, 김전을 예조판서로, 신용개를 병조판서로, 허굉(許
?)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신상(申?)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김안로(金安
老)를 직제학으로, 이빈(李?)을 전한(典翰)으로, 유보(柳溥)를 응교(應敎)
로, 홍언필(洪彦弼)을 부응교로, 유인숙(柳仁淑)을 수찬(修撰)으로, 채침(蔡
沈)·김구(金絿)를부수찬으로삼았다.
◎1515년(중종10)2월22일(경술)
좌의정 정광필·우의정 김응기·형조판서 강혼·병조판서 신용개·우찬성
장순손(張順孫)·이조판서 박열(朴說)·우참찬 이계맹·지중추부사 안윤덕
유담년·호조판서 고형산·공조판서 안당·한성부 판윤 이자건·병조참판
이장생·형조참판 유미·풍창군(豊昌君) 심형(沈亨)·계림군(鷄林君) 최한
홍(崔漢洪)·청양군(菁陽君) 유계종(柳繼宗)·병조 참의 김극성·판결사 윤
은보(尹殷輔)·예조정랑반석평(潘碩枰)등이의논드리기를,
181)묘정:문묘(文廟)
182)우원:실용에적합하지아니함
7장조선왕조실록에기록된내용│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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