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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했다. 가업(농사 등)에 전념해서 800석
지기의 땅을 3300석지기로 늘렸으나 1950
년의 농지개혁으로 모든 땅을 팔아야 할 때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가족이 모두 보령으로 피난하고 혼자 집을
지킬 때 좌익들이 그를 붙잡으러 온 것을 마
을 주민들의 제보로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재에 밝았던 그는 그 후 서울에 올라가 사
업을 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고 어느 정도 재
산이 모아진 뒤에 다시 낙향해서 조용히 살
았다. 그는 주변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
금을 대주기도 했다. 늘 헌 옷을 입은 채 부
<성준경 고택>
지런히 일하는 그의 충고 덕분에 인근 주민
들은 담배 농사 등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고택 뒤에 있는 잘 가꾸어진 솔밭에 그의 묘가
있다.
[10] 심언봉
沈彦俸
<1922. 10. 24 ~ 1954. 12. 20>
아산시 음봉면 산동리 출신의 군인이다. 천안공립보통학교(현재의 천안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 제
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육군 중위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1946년 1월에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대한민
국 국방군→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군번이 22번이었다. 그는 청주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제7연
대 창설에 직접 참여하였다.
1949년부터 육군병기학교 교장(계급-대령)으로 재임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육군
병기감에 임명되었다가 1951년에 준장(准將)으로 승진하여 3군단 참모장을 거쳐 육군헌병사령관을 지냈다.
소장(小將)으로 승진하면서 제3대 논산훈련소(제2훈련소) 소장 겸 충남북 지구 위수 사령관이 되었다. 훈
련소장 시절 공병대를 파견하여 파괴된 천안초등학교의 건물을 2층으로 새로 지어주기도 했던 그는 재임
중에 순직하여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묘
는 국립대전 현충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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