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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만한 고통은 타고장에 비하여 아주 적다는 의미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예산지역의 근대사에서 민속에 영향을 준 역사적인 사건은 엉뚱하게도 대원군이 아
버지 남은군의 산소를 가야산 명당으로 이장한 사건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남은군의
산소는 당대 발복發福의 명당이라는 면에서 여러가지 전설 같은 민담을 만들어 냈으며
이장에 사용했던 상여는 지방유형문화재로 선정되어 보관되었다. 이는 명당을 품고
있는 산인 가야산과 어울려 남은군 산소가 있는 상가리와 옥계리 등의 두레나 마을
문화에는 색다른 영향을 끼쳤다. 남은군 산소는 두 마을의 두레가 인근 마을 두레들
의 어른으로 활동하는 근거가 되었다. 상가리와 옥계리 노인들은 두 동네는 남은군
산소로 인하여 다른 마을 두레의 어른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을 정도다.
윤봉길 의사의 일생 또한 덕산의 민속에 영향을 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본명은 우
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본은 파평坡平이다. 윤황璜의 아들로 3·1운동 때 ‘왜놈의 교육
을 받지 않겠다’며 소학교를 자퇴하고 독학하여 19세 때 야학을 설치, 22세 때 월진회
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농촌의 자립과 계몽에 힘썼다.
1930년 상해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왜
국천황 생일축하 겸 상해사변 전승기념을 거행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 식장에 김구金九
주석의 지시로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대장을 살해하였다.
의거 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잡혀 상해의 일본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
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영향은 월진회나 선양사업의 각 단체가 윤봉길 의사의 선양 사업은
물론 지역의 민속예술을 선양하는 사업을 펼침으로써 지역의 향토 문화 발전에 기여
하게 된 것이다. 월진회는 보부상놀이 재현 관련 단체가 양분되어 일부가 예덕상무사
를 이탈하여 보부상 난전놀이 공연단으로 활동하고 있을 시 오래 동안 이를 후원하여
공연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큰 사건이 적었던 고장 예산의 역사에 기반하여 평온하고 느긋한 정서를 만들어 냈
으며, 이는 예산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적 뿌리가 평화로운 기풍에 쌓여 안온함을 즐
기는 예술로 전개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사료된다.
1장. 예산민요의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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