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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명문 가문의 준재였지만 일찍이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지인들과 함께 학문과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평생을 살았다.
『연암집』
은 젊은 시절부터 연암이 교유했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 써준 각종 서문과 발문 및 묘비명(묘지명) 등 일상의 순간들이 살아 넘치는 연암
문장의 보고( 庫)다. 위에 인용된 글은 연암이 자신의 처남이자 지기인 이재성을 위해 써준 <소단적
치인(
)>이란 글의 일부다.
‘소단적치’
란 소단[=문단(
)]의 붉은 깃발, 즉 이재성이 선인
들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선인들의 명문장들을 모아놓은 책 제목이었다. 한 마디로 가장 공식적인
글쓰기의 모범답안이었던 셈이다.
연암은 글의 처음부터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며 종횡무진 서술한다. 글쓰기와 병법이라는‘생뚱
맞은’두 대상은 연암의 날카로운 문장 아래에서 절묘하게 부합되어 간다. 글자는 병사와 같고, 뜻은
장수와 같으며, 제목은 제압해야 할 상대이다! 하지만 결론은?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예컨대 전장(
)을 뚫고나온 선조들의 군사전략들이란 모두 훌륭한 사례들이 틀림없긴 하지만, 그러한 모범적인
전법들이란 또한 바로 그와 같이 적절한‘때’
에 따라 창조된 것이 아니냐는 것! 문장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선배들의 문장이 좋다 해도 그것을 쫓아 흉내내서는 결국 가짜가 될 뿐이다. 천하의 대문장이
란 고금에 유래가 없는 바로 그 사람만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누구의 문장을 따를 것인가가
아니다. 진실로 이치를 담고 있다면 고급 문인관료의 글이나 말 뿐만 아니라 시속의 아이들 노랫소리도
최고의 문장이 될 수 있다!
연암의 이러한 문장관은 후배인 박제가의 문집에 붙여준 <초정집 서문>이나 제자 이서구에게 일러준
<녹천관집 서문>, 친구인 이덕무의 시집에 써준 <영처고 서문> 등에서도 비슷한 듯 다르게 변주된다.
그 비슷함에서 문장에 관한 연암의 뚜렷하고 일관된 삶의 태도가 드러난다면, 그 미묘한 차이들을
따라서는 서로 다른 조건과 대상 앞에서 글을 쓰는 연암의‘변화하고 합하는’유연함이 드러난다.
이렇듯 연암의 모든 글은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순간과 마주침으로써 생성되는 반복불가능한 단 한번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연암은 글쓰기가 어떻게‘나’
와‘우주’
가 만나는 사건의 현장인가를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지금 이곳’
에서 나의 글을 쓴다는 것. 연암의 이러한 문장관은 단순히 현대의 유행을 따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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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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