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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祥虎) 또한 효행으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후손 권형경(權衡經)도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의 직계 후손들이 확인되지 않아서 자세한 사항을 파악할 수 없다.
[10] 안동권씨 권확
| 權
<1568년(선조 1년) ~ 1638년(인조 1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안동권씨(安東權氏) 23세로 추밀공파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지역 입향조이
다. 선대는 주로 경기도 양주와 파주 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현재 공세리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
34세(世) 권영재(權寧宰, 78세)씨의 11대조이다.
생육신 권절(權節)의 5세손이고 전력부위 권자평(權自平)의 현손, 상의원 직장 권세헌(權世憲)의 증
손, 사복시정에 증직된 권윤희(權胤禧)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학자이자 은일처사로서 좌승지로 추증
된 권결(權潔)이고 어머니는 임단김씨(臨湍金氏)로 정랑 김사근(金思謹)의 딸이다. 일(鎰)과 확(
남 중 둘째 아들이다.
권확의 자는 사중(士重)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다. 집안에서는‘석계공’
으로 칭한다. 1611년(광해군
3)에 신해 별시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나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
瞻)에 의해 기각 당하였다. 북인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고자 했던 이른바 폐모론에 반대
하여 좌천, 삭직을 거듭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언(正言)으로 복직하였다. 사간·집의·길주
목사·승지·호조참의·해주목사·여주목사 등을 거쳐 1633년(인조 11)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
품)에 올랐다. 병자호란(1636~1637) 끝에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1637년에 관직에서 물러
나 아산 공세리 농장으로 들어와 머물다 세상을 떴다. 370여 년 전의 일이다.
부인은 죽산안씨(竹山安氏)이며 군수 안사흠(安思欽)의 딸이다. 계(
), 영(
), 후(
), 우(
)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둘째아들 권영은 한성좌윤에 올랐다. 넷째아들 동곡(東谷) 권우는 문과급제 후 경
상·충청·전라·함경도 감사를 역임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아버지 권확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
증되었다.
권확이 실제로 아산에 거주한 것은 불과 1년 정도이며 묘가 경기도 파주에 있고 아들부터 증손자까
지 모두 묘가 경기도 양주와 파주 등에 있어서 실제로 아들과 손자 등 후손들이 공세리 지역에 거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둘째아들 권영이 1668년(현종9)에 무고를 당하여‘아산 고향으로
퇴거했다’
는 기록이 있고 큰아들 권계의 증손 권수형(權壽衡)과 그 후손, 둘째아들 권영의 증손 권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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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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