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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이·야·기
리 고장에서 전문적 연예활동이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똑바로 살펴볼 길이 없으나 옛날 고대사회에서 여러 집단
적인 행사나 제 또는 나쁜 신을 막기 위한 굿을 할 때 노래와 춤
이 어울려서 연예활동의 시초를 이루었고 이것이 개화되어 연예
활동으로 된 것이라고 보면 우리 고장에서 연예활동의 시초도 그
시기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우리 고장에서 본격적인 연예활동을 시작한 시기를 기
록 한다면 아무래도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이루어진 형태를 가
지고 기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온양지방에 대중 연예활동의 전당이며 제공처의 역할을
해온 상설 극장으로 문을 처음으로 연 곳은 천낙관 이었다.
1926년 온양에서 처음으로 생긴 천낙관은 그 시설만 해도 다른
도시에서는 이러한 상설극장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극장
이라야 지붕과 사면의 벽이 모두가 함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설
극장과 비슷했지만 당시로서는 이 고장에 있어 유일무이한 문화
의 전당으로서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경남철도 (현재의 장항선) 사
회의 부사장 아끼모도(추본)가 그 당시의 명소인 신정관(현재 온
양 관광호텔)의 부대시설로서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천낙
관에서는 주로 요양소에 있는 일본 군인들의 위안 공연장으로 쓰
여 졌고, 가끔 영화나 연극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극장에
서 상영되던 무성영화에 관객들은 흥분되기가 일쑤였고 장화 홍
련전등의 연극을 관람하면서 수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고 연
극에 도취되는 등 실로 당시로서는 크나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한 일부 장난기 많은 청소년들이 심
술궂게 돌을 던지는 통에 연극이나 영화가 상영 내지 공연될 때
면 온통 소란스런 소리가 나서 잠시 중단되기도 하는 등 지금 생
각하면 상상도 못할 상황들이었다. 그러나 이 천낙관이 생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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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타이딩
A-san of Ti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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