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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문화원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소담옹기
[4] 효자 권대평 <權大平>
세 번 손가락 베어 부모님 병환에 드려
조선 후기의 효자로 아산현 남면 금곡리, 현재의 염치읍 방현리 쇠일 마을에 살았다. 본
관은 안동(安東)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뒤 안동 권씨 집안의 사람으로는 아산 염치 지
역에 처음 들어와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한 권지(權芷)가 그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역
시 효행으로 주부(종6품 관직)에 추증된 권형(權泂)이다.
효자 집안의 후손답게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부모가 병을 앓게
되자 모두 세 번이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드렸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몹시 애통해하
며 묘 옆에 여막을 짓고 한결같이 예제를 지켰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새벽마다 사당에
나아가 예를 올리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효행은 온 고을에 널리 알
려졌다.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했을 때 고을 유림의 대표인 이지강(李之
綱)이 그의 포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를 포함해서 효자 김효일(金孝一),
홍절(洪?), 이덕민(李德敏)과 열녀 막개(莫介) 등‘4효1열(四孝一烈)’
의 포상을 요청
했다. 이것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져 그는 효행으로 의금부도사(종5품)에 추증(죽은 뒤
에 품계를 높여주는 일)되었다.
[5] 효자 권상룡, 권상호 형제 <權祥龍, 權祥虎>
형제가 어머니 대변 맛보며 기도
조선 후기의 염치읍 방현리 쇠일 마을에 살던 효자 형제이다. 안동 권씨이며 감찰 권지
(權芷)의 증손자이고 효행으로 주부에 증직된 권형의 손자이며 효자로서 금부도사에 증
직된 권대평(權大平)의 아들 형제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평소에
도 부모 섬기기에 효도를 다하였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었다. 이들
형제는 어머니의 대변 맛이 단지 쓴지 먹어 보면서 칠성님께 빌며 어머니 쾌차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죽만 먹으며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렀다. 또
한 어머니의 삼년상이 끝나자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을 지극히 애통하게 여겨서 형제
가 아버지를 위해 다시 상복을 입고 아버지 삼년상을 모셨다. 한 집안에서 계속해서 효자
가 나타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일이라고 탄복하며 일제히 관찰사(감사)에게
포상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마침내 이 사실이 숙종 임금에게 알려져서 1719년(숙
종 45)에 형제에게 특별히 관직이 내려졌다. 형 권상룡은 좌랑(佐郞)으로, 동생 권상호
는 지평(持平)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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