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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권지
權芷
<? ~ 1641(인조 19년)>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안동 권씨 아산, 음봉 동천리 지역 입향조이며 추밀공파
정헌공의 후예이다. 자는 숙형(叔馨)이며 부인은 나주(羅州) 박(朴)씨이다.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급제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선략장군(宣略將軍)이 되어 활약하였다. 만년에는 아산현 일동면 시곡(柴谷: 아
산시 음봉면 동천2리 시곡-시궁골) 수한산성(물앙성) 아래 10여리의 땅에 터를 잡고 살았다. 묘소는 그가
살던 시곡에 있다. 그의 손자가 음기(陰記)를 지어 세운 묘갈이 있으며 인근에서는 그의 묘를‘권장군 묘’
라 부른다.
형(泂)·윤(潤)·길( ) 등 3남 1녀를 두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모두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이 주어지고 명
망이 높았다. 아들 형(泂)은 효행으로 주부(注簿)로 증직되었고 손자 대평(大平)도 효행으로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 무과에 급제한 그의 증손자 상룡(祥龍)은 후에 역시 효행으로 승훈랑 좌랑으로 증직되었고
증손자 상호(祥虎) 또한 효행으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다.
<권지의 묘와 묘갈>
[13] 권확
<1568(선조 1년) ~ 1638(인조 1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생육신 절(節)의 후손이고 부친은 결(潔)이다. 자는 사중
(士重)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다. 1603년(선조 36)에 계묘 식년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했다. 1611년(광해
군 3)에 신해 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한 뒤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나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
瞻)에 의해 기각 당하였다. 역시 대북인 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고자 할 때 4
관(성균관·예문관·교서관·승문원)에 문서를 돌려 그들의 과거 응시권을 정지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
의 계략에 의해 파직되었다. 뒤에 승문원에 복직되었지만 이이첨의 아들 홍엽(弘燁)이 과거에서 대리시험
을 친 사실을 폭로하여 다시 삭직되었다. 곧 복직되었으나 1618년(광해군 10)에 폐모론을 내세우며 이이
첨 등이 궁궐에서 정청을 할 때 참여하지 않아 그 보복으로 전적(典籍)으로 옮겨졌다. 청나라와 갈등이 생
기자 평안도독운사의 종사관이 되어 나아갔다. 그 후 낙향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언(正言)으로
복직하였다. 사간·집의·길주목사·승지·호조참의·해주목사·여주목사 등을 거쳐 1633년(인조 11)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에 올랐다. 1636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 공세리 농장으로 퇴거하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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