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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과 성리학에 밝은 학자였다. 그는 충신(忠信)을 위주로 실천하였고 주공 공자 · 정자 ·
翁八年謫人間
인간세상귀양온8세천재황정견인듯
주자의 학문을 탐구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정진하였다. 그는 노장 사상이나 불교
長吉七歲吟高軒 ‘고헌과(高軒過)’를읊은일곱살이하(李賀)려니
· 양명학 · 천주학 등은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그는 재도적 문학관을 견지하였다. 경전은 도
元氣天成童子筆
원기를타고난동자의필세
를 실은 그릇으로 정도에 순수하고 문장가는 술수를 싣는 그릇으로 간사함과 정도가 섞여
硯池揮出黑龍?
먹물로힘차게쓰니검은용웅크려있네
있어서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장가가 세상을 의혹하게 만들고 매우 도를 해친다고
비판하고 사람들이 문장만 알고 경전이 있는 줄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전을 문장의
황준량은 어려서부터 시와 글씨에 타고난 이산해의 재주를 칭송한 것이다. 이산해는 성
전범으로 삼고 현실 상황에 맞게 변통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열중하여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승문원 권지로 벼슬
그는 서예 이론에 정통한 서예 비평가자 서예가였다. 서예를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길에 들어가서 바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62년 예조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 9명을 선발
서예 이론으로 가장 먼저 정립한 사람이 바로 이서이다. 성대중도 서예학은 이서로부터 시
할 때 그도 뽑혀서 해서와 초서 등 큰 글씨를 썼다. 경복궁의 편액의 글씨를 썼으며, 이외에
작했다고 인정한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서의 대표적 서예 이론에 관한 저술이 바로 『필
도 ,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결(筆訣)』이다. 중국 서예가의 작품을 모방하던 당시 서예 풍조를 비판하고 그는 『필결』을
또한 이산해는 문장에도 명성이 높아 당대에 송익필(宋翼弼) · 최경창(崔慶昌) · 백광홍
통해 올바른 서예의 요체를 제시하고자 했다.
(白光弘) · 최립(崔?) · 이순인(李純仁) · 윤탁연(尹卓然) ·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팔
이서의 서예 미학의 특징은 『주역』의 음양이론을 기반으로 서예를 이해했다는 점이다.
문장(八文章)으로 불리었다. 그는 26세 때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그는 서예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로 중정(中正)을 제시하였다. 모든 서법은 중정
뒤 부수찬, 병조정랑, 이조좌랑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당대의 권신 윤원형을 탄핵하
을 주로 삼을 뿐이지만 글씨를 쓸 때에는 수시변통의 묘를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의
기도 하였다.
구성법은 글자가 만 가지로 변하지만 일기(一氣)로 관통해야 하며 조화된 기운이 서로 변화
대사간, 도승지, 이조판서, 우의정을 두루 역임한 그는 52세 때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
하는 오묘함을 알아야 글씨를 안다고 했다. 또는 획의 변화는 회통(會通)함을 살펴 수시로
란이 일어나자 그는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西狩論)을 주장하여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떠나
변화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도록 했다. 그러나 이 일로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로 귀양가서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
그는 서예 이론에 기반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시하였다. 진체는 왕희지 글씨를 말
다. 이 시기에 『아계유고』에 수록된 한시 840수 중 절반이 넘는 483수를 지었다.
하므로 동국진체는 우리나라의 왕희지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동국진체는 변화와 창신
그 뒤에 그는 사면되어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61세 때 다시 영의정에 올랐
을 통해 개성이 넘치는 조선풍의 서예를 추구한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전통적 미의식의
지만 탄핵을 받았다. 관직을 사임한 그는 충남 신창 시전촌으로 내려가서 만년을 보냈다. 묘
고수와 형태미에 치우쳐 의고적(擬古的) 서예에 빠진 당시 폐단을 바로잡고 새로운 서예를
소는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양지말에 있다.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이서는 변화와 창신을 추구하여 개성이 넘치는 글씨를 썼지만
그의 글씨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바로 중정의 미학이다.
3)동국진체의창시자,이서
그의 저술은 『홍도선생유고(弘道先生遺稿)』가 있으며 많은 서예 작품이 전해오고 있다.
묘소는 본래 고덕 상장리에 있었는데 후손이 강원도로 이장해갔다.
이서(李?)의 자는 징지(徵之)이며, 호는 옥동(玉桐) 또는 옥금산인(玉琴散人)이다. 서
울에서 태어난 그는 재주가 출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퇴계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그는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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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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