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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홍식
金弘植
<1909. 3. 1 ~ 1974. 2. 21>
아산 출신이며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31년에 경성법학전문학
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이어서 고등문관시험의 사법과와 행정과 양과에
동시에 합격했던 수재이다. 1938년에 평안남도 양덕군수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고 경기도 부천군수를 역
임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일본식 이름은 岡田弘政(오카다 히로마사)이었다. 1945년에 경기도 광공
국장을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이후 변호사로 개업하여 법조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경제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1956년에 사법위원에 임명된 뒤부터 다시 행정 관료로 전환하였다.
그 뒤 1960년에 제7대 충청남도지사(1960.5.2~1960.10.7)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법제처 차장이 되었
다.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 서울시지구당 사무국장을 잠시 맡았다가 바로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964년 7월에 제18대 체신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5년에는 서울신문 이사를 거쳐 민주공
화당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5] 맹은재
孟殷在
<1935. 4. 20 ~ 1984. 12. 6 >
아산 출신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창 맹씨로 맹사성의 후손이며 아산시 배방면 중리 440번지에서 출생
했다. 온양초등학교와 온양중학교, 온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으
며 재학 중이던 1960년에 전국 대학생 모의국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1961년에 졸업하고 1977년에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아산을 떠난 뒤 주로 인천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1972년의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구성된 제1,2대 통일주
체국민회의 대의원(1972~1978)이 되었다. 그 기간 중이던 1974년에 온양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맡기도 했
다. 1976년에 새마을 금고 인천시협의회장, 1977년 주안 감리교회 장로로서 전국 YMCA 이사를 역임했다.
제11대(1981.4.11~1985.4.10)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시 인천시 제1선거구(중구·남구)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임 중에 민주정의당의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국책 연구위원을
맡았고 국회에서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임기 중에 세상을 떠났다.
[6] 문희석
文熙奭
<1922 ~ ? >
아산 출신이며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 일본 동지사대학교(同志社大學校)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1947년) 1949년부터 중앙대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6.25
전쟁 중에 군(軍)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며 1952년에 해병대 작전국장, 1956년
해병학교 교수부장(계급-중령) 등을 거쳤다. 1958년부터 국방대학원 교수로 재
임하던 중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해병대 대령이던 그는 군정 기간 중 제10대 문교부장관(1961.5.20~1962.1.8)
에 발탁되었다. 40세로서 역대 최연소 문교부장관이었으며 당시에는‘군복 장
관’
이라고 하였다. 퇴임 후에 바로 군으로 돌아가서 해병대 제2훈련단장을 맡
았다. 이후 1965년 한국전략연구회장, 1968년 건국대총장, 1972년 향군회자문
위 원 을 역 임 하 였 다 . 1974년 부 터 는 한 국 교 교 직 원 공 제 회 제 3대
<문희석>
(1974.3.18~1976.2.20), 제4대(1976.2.21~1978.2.16) 이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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