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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보령의바다
문을 배워야 지방(紙榜)이라도 쓰고, 집안의 기둥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권유로학교를그만두고한문을공부하였다.
여수해에는중선배가하나있어멀리조기를잡으러다녔다.배가낡아물을퍼내면서다
녔어도 멀리 다니면서 조기를 잡았다. 선원들은 외지 분들이 많았고 여수해 분들도 외지의
중선배를 많이 탔다. 그 외 마을 사람들은 돛 2개 달린 작은 낙배를 타고 다니면서 낚시질
을해서팔았다.멀지나가지못하고삽시도안쪽에서주로조업하였다.
보령화력발전소부지로수용되어이주할때여수해마을에는약20여호가살았는데,모
두 각성받이로 송도에 집성촌을 이루는 유씨가 몇 가구 거주할 뿐이었다. 주민들이 거주한
것은해안이었다.해안에남향으로집을지었기때문에앞쪽에논이있었고뒤에바다가있
었다.샘은마을서쪽에있었다.큰샘이라고불렸고물이많고좋았다.
여수해 마을 주민들은 서로 속한 면(面)은 다르지만 가까이 있는 한여, 마동, 송도 주민들
과 가까이 지냈다. 특히 한여와 마동 주민들은 초군계를 만들어 애경사를 함께 챙겼다. 거
리도가깝고대천장을왕래하는데같은길로다니면서어울렸기때문이다.
보령화력발전소가 들어오기 전, 여수해 마을에서 영보리 마을까지 제방을 막아 간척을
하였다.결성사람이와서막았는데막대한비용을들여제방을완성하였고,논을만들지는
못했다.보령화력발전소부지로수용되어많은보상을받았다.
여수해 마을과 영보리 사이의 갯벌에는 낙지가 많았다. 김살을 매다가도 금방 20~30마
리를 잡았다. 다른 해산물은 많지 않았고, 낙지가 아주 많고 맛도 좋았다. 여수해 주민들은
언제나마동마을앞조개바탕에서바지락을잡았다.캔바지락은온가족이달라붙어까서
소금에버무려젓을담았다.통이가득차면광천장에팔았다.바지락은여수해주민들의큰
소득원이었다. 여수해에서는 굴양식도 조금 했다. 배로 돌을 실어다가 넣어 양식했는데, 소
규모였다.성과는그런대로좋아소득원이되었다.
여수해 갯벌에는 덤장을 맸었다. 처음에 경상도 사람이 와서 시작을 했고, 마동 사람이
사서 운영하였다. 덤장에는 여러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특히 봄에 숭어가 많이 잡혔다. 어
떤때는배에가득잡기도하였다.
여수해갯벌에서는예전부터김양식을하였다.옛날부터왕대나무를쪼개엮어양식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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