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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충남학 특강 - 충청 유교문화와 예산 유교문화유적
人, 物의 차별성을 주장하여 당시 성리학계 최고의 문제 거리였을 뿐 아니라 20세기 초 조선조가
의 사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글에서는 이들 모두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간략히 그 대강과
종언을 고할 때까지 계속된 한국 성리학계 최고의 이론적 관심사였다. 이러한 人物性 同異論爭을
중요 부분을 표집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통해 조선조 성리학이 보다 정밀하게 심화된 것은 송대 성리학이 남긴 과제의 해결이라는 점에서도
향교와 서원, 사우 : 예산, 대흥, 덕산의 향교는 다른 지역의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의 관학 교
높이 평가된다.(황의동,「기호유학에 있어서 이기론의 특성과 전개」, 『국사관논총』, 65집, 1995)
육기관으로 조선조 전 시기를 존속하였다. 현재 이들 향교에는 각종 기문과 성책고문서, 그리고 건
축문화 유산들이 남아있고, 특히 제향의례의 전통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유교문화의 모습을 전해주
2-4. 한말 충남유학 - 다양한 현실대응 -
고 있다. 예산 향교의 경우 유생안과 청금록, 흥학절목, 유생수규, 각종 완문과 절목류 자료들이 남
아 전하는 특별한 경우이고, 대흥향교와 덕산향교도 중수기록과 관문류 기록, 유생안, 입의, 폐단
선비정신의 실체는 도덕적, 관념적인 것과 동시에 현실문제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비판 정신이다.
절목 등의 각종 고문서 자료가 전한다.
이러한 실천정신이 실로 다양하게 구현된 곳이 바로 한말의 충청지역이었다. 변화에 대응하고 이를
예산의 서원, 사우로는 덕암서원, 회암서원, 우천사우, 소도독사 등이 있었는데 덕잠서원(德岑書
수용할 줄 아는 진취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충청유학의 지성적 활동들은 조선후기 내포지역
院)에 제향된 자암 김구(金絿, 1488-1534)는 예산출신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마치고
의 실학이나 천주교의 전파, 한말의 의병활동, 그런가하면 한말 일제시기의 개화운동과 민족운동으
귀향하여 일세를 마친 글씨와 학문으로 저명했던 인물이다. 덕잠서원은 1705년(숙종 31) 창건되어
로 되살아났다.
1714년에 사액을 받은 예산군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그는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 장사언, 한
조선왕조의 기본체제가 이완되고 점차 서구의 물결이 새롭게 전파되자 이에 대한 반응을 충남인
호(瑢, 楊士彦, 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그 후 이러한 예술은
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지
한국의 최고의 서예가이며 고증학자인 추사 김정희에게 이어지며 신암면에는 그가 거처하던 고택,
만, 우선 실사구시의 실학적 분위기가 그 첫째이고, 천주교의 전래와 확산에 내포지역이 중심지가
묘소와 기념전시관이 있다. 이러한 예산의 전통이 바로 근대에 이르러 고암 이응로로 이어져 오늘
되는 것이 둘째이며, 한말척사위정의 의병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 세째이며, 그런가하면 동학의
에 이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움직임이 크게 발현된 것, 또 한말개화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중요 인물들이 배출된 것이 바로 그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서원골에 1709년(숙종 35) 창건된 회암서원(晦庵書院)은 대원군의 서원훼
것이었다. 그냥 주장을 하려고 주섬주섬 끼워 맞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역사의 흔적
철 로 유허지만 남아있다가 저수지 시설로 매몰되어 현재는 서원유허비(書院遺墟碑)만 남아 있다.
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아주 명쾌하고 강한 선으로 우리 지역에 자취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서원에는 주자를 주향으로 하고 정존재 이담, 야곡 조극선, 취암 이흡, 풍애 안민학 등을 배향하
이로써 보면 충남인들은 그저 점잖다거나 온화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들은 마치 충남인
였던 곳이다.
들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활기찬 모습과, 어떠한 사회변화에도
우천사(牛泉祠)는 대흥에 유배 와서 약 1년 만에 죽은 이약수(李若水 1486~1531)를 제향하는 사
모든 모습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봉건적인 신분의
우로 1708년(숙종 34)에 호서지역 200여 유생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대흥현에 창건하였고,
차이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모든 계층과 세력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변화에 대응하는 이 모습에
‘우정사(牛井祠)’ ‘ 천서원(?泉書院)’ 등으로도 불리운다. 이약수는 중종조의 학자, 정치가로 김굉
서, 그리고 꼭 10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개항시기의 혼돈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오늘의 현
필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투옥되어 여러 곳을 거쳐 1531년(중종 26) 대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
실에서, 우리가 다시 챙겨야 할 충남의 유교정신은 바로 이같이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진취적 기상
나 그해 대흥에서 죽었다.
과 적극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조묘와 영당으로는 목은영당, 문열공 이계전 부조묘, 이산해 부조묘, 조익 사당, 이산보 부조
묘 등이 있다.
충, 효, 열 정려와 인물 유적 : 예산은 ‘의좋은 형제’로 알려져 있듯이 예를 숭상하여 위의 [표]에서
3.예산의유교문화와유적
보듯이 충효열 정려가 가장 많은 곳으로 저명하다. 그런가하면 학문과 예술의 텃밭이기도 하였다.
예산지역에는 경쟁력 지닌 저명 유교문화자원이 풍부하게 남아 있으며, 유적과 인물, 그리고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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