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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었다. 국내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 더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9세가 되던 1944년에 일본에서의 활동을 접고 귀국해서 예산공립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광복을 맞았다. 1952년에는 증산교에 들어가 김제 금산사에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1
년 56세 들어 온양에 와서 정착하고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서예와 전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문화
공보부 심사위원,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유작이 다수 전해지며 일본에서 <
고석봉 작품집1,2> 등이 발간되었다. 지난 2006년 12월에는 한국(예산군 문예회관)과 일본에서 100주년
기념 유작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3] 김용래
金庸來
<1934. 3. 15 ~ 2009. 2. 20>
아산시 배방면 휴대리 출신의 관료 및 사회기관단체인이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에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에 서울대학교 대학
원에서 행정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미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에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내무부 기획감사과장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농림부 공무원을 거친 정통 내무
행정관료 출신이다. 총무처 기획관리실장(1972~1974), 중앙공무원교육원장,
대통령 정무2수석, 제8대 총무처 차관(1980.5~1984.10), 제21대 경기도지사
(1986.1~1987.12) 등을 지냈다. 바로 이어서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제21대
<김용래>
(1987.12~1988.12) 서울특별시장으로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후
제11대 총무처 장관(1989.3~1990.3)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여 1997년에 공개 초빙을 통해 덕성여대 총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충청향우회중앙회 총재가 되었으며 충청향우회 산하에 조직된 충청장학문화재단 이사장도 겸하였다. 이
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사업 추진 등을 뒷받침하기 위해 2008년 6월에 조직된‘새물결 국민운동’중
앙회장을 맡았고 2008년 12월에 조순 전 부총리에 이어 재단법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2대 이사장에 취
임했다.
아산시 명예시장에 위촉되었던 그는 2007년에 개인 소장 도서 1만여 권을 아산시립도서관에 기증하기
도 하였다. 1985년에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정조근정훈장, 올림픽 훈
장 은장, 교황청 강복장 등을 수상했다. 부인은 조송자이며 환석, 환주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묘소는 아산
시 배방면 휴대리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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