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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풍산홍씨 홍중징
| 洪重徵
<1682년(숙종 8년) ∼ 1761년(영조 37년)>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풍산홍씨(豊山洪氏) 14세로 문경공파 남원공계의 아산시 지역, 배
방읍 세교리 입향조이다. 선대는 주로 서울과 경기도 고양 지역에 거주하였다. 배방읍 세교리에 살고
있는 23세(世) 홍병식(洪丙植, 63세)씨의 9대조이다.
그는 대사헌을 역임한 문경공(文敬公) 홍이상(洪履祥)의 현손이고 통정대부로 남원부사를 지내서‘남
원공’
으로 칭하는 홍탁(洪
)의 증손이며 진사과 급제 후 양성현감을 지낸 홍주천(洪柱天)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사마시와 문과 급제 뒤 여덟 번의 관찰사와 형조·공조판서 등을 거쳐 판돈녕부사에 오른
호 만퇴당(晩退堂) 시호 정익공(貞翼公) 홍만조(洪萬朝, 1645~1725)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증
참의 권진(權
)의 딸이다.
그는 중형(重亨), 중휴(重休), 중인(重寅), 중징(重징) 등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위의 첫째 홍중형은 안성을 거쳐 천안 쪽에, 둘째 홍중휴는 충주 지역에, 셋째 홍중인은 천안 쪽에 터
를 잡았고 첫째와 둘째는 만퇴당 생전에 먼저 죽었다.
홍중징의 초명(初名)은 중흠(重欽)이고 자는 석여(錫餘) 호는 오천(梧泉)이다. 부인은 동래정씨이며
정주(鄭 )의 딸이다.
그는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갑과 3위로 급제하였고 용인현감 등을 지낸 뒤 1728년(영조 4) 장령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토벌할 계책을 올려 이듬해(1729)에 분무원종공
신에 녹훈되었다. 이후 제주목사, 형조참판 등을 거쳐 1754년(영조 30)에 공조판서에 오르고 기로소
(耆老所)에 들게 되었다. 79세 때인 1760년(영조 36)에 마침내 사직이 윤허되니 왕은 손수 글을 써서
그를 포장(褒奬)했다. 80세가 되어 정1품 숭록대부(崇錄大夫)에 올랐고 치사봉조하(致仕奉朝賀)에 제
수되었고 그 해에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그가 배방 세교리에 들어온 시기와 사유는 불명확하다. 일부에서는 그의 아버지인 홍만조를 입향조
로 보고 있으나 홍만조는 배방에 거주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홍만조와 홍중징의 묘가 세교리
같은 장소에 있는데 이는 사패지이기 때문이다. 홍중징은 세교리에 거주하였고 그의 아들 순보(純輔)
때에 회룡리로 이주하였다. 이후 홍중형의 현손 홍희빈(洪羲賓, 1740~1814)이 다시 세교리로 들어
왔으며 그 후손들은 스스로‘만퇴공파’
로 칭하기도 한다. 이와 구분하여 홍중징의 후손들을‘봉조하공
파’
로 칭하기도 한다.
홍순보는 노성현감을 지냈고 극호(克浩), 제한(梯漢), 욱호(旭浩) 등 세 아들을 두었다. 홍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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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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