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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필선
姜弼善
<1918. 1. 26 ~ 1990. 9. 22>
아산 출신의 경제인·정치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며 호는 의당(義堂)이
다. 배방면 신흥리의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13세 때인 1930년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1937년에 만주 중앙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다
시 일본 내무성 경찰강습소 본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한 뒤 만주로 가서 만
주 중앙경찰학교 조교수와 학감(學監)으로 근무했다. 1940년 23세 때 만주 고
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만주
길림성의 창바이(장백-長白)현 한인회 민선회장을 맡았다가 12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잠시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온양에서 동방산업을 설립했고 온양
극장과 온양정미소 등을 세워 경영했다. 경제 활동 외에도 지역 인사들과 함
<강필선>
께 온양문화원을 설립해서 초대원장(1957~1958)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정치
활동도 시작해서 1961년 5·16군사정변 후에 재건운동 아산군 촉진회장을 맡았고 이후 김병로(金炳魯)·
윤보선(尹潽善)이 주도하는 민정당(民政黨, 1963~1965)에 들어가 아산지구당 위원장과 충남도당 부위원
장이 되었다. 이어 민중당을 거쳐 1967년에 신민당(新民黨)으로 재편된 뒤 역시 신민당 아산지구당위원장
겸 충남도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대한곡물협회 충남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1년에 신민당 비례대표로 제8대(1971~1972)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1972년 10월의 유신헌
법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후 신민당 지도위원과 대한곡물협회 상임고문이 되었다. 다시 통일당(민주통일
당, 1973~1980) 정치위원 겸 당기위원장을 역임한 뒤 전두환의 이른바 구정치인 활동금지 조치로 정계
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이후 1982년에 현재의 문화원 맞은편에 의당복지회관을 지어 기부체납하고 지역
에서 몇 가지 사업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그가 세상을 뜬 후 후손들이 그의 호를 따서 의당장학재단을 설
립해서 지역 장학사업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묘는 고향인 배방면 공수1리 안모산에 있다.
[2] 고봉주
高鳳柱
<1906. 3. 23 ~ 1993 >
충남 예산 출신의 서예 및 전각 작가다. 호는 석봉(石峰)이며 7세 때부터 한
문과 서예를 공부했고 1921년에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에 일본인
교장 추방 운동의 주동자로 국내에서 진학의 길이 막히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
본대학 사회학부 전문반에 입학했으나 그해에 조선인 노동 동맹회에 가입했
다가 종신 금고형을 받고 은둔 생활을 했다. 27세 되던 1932년에 일본인 서예
가 히다이 텐라이(比田井天來)를 소개받고 3년간 기숙하면서 그로부터 서예와
전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인 스승은 물론 일본 서예·전각계에서 인
정을 받았다. 그의 전각예술은 일제 식민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자신
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됐다. 당시에 일·만·화(日·滿·
<고봉주>
華) 친선 서도 전람회에서 척무대신상을 받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그가 수시
로 일본에 건너가 개인전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예술 수준을 이미 인정받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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