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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충남학 특강 - 충청 유교문화와 예산 유교문화유적
하게 된다. 한편 成渾-尹煌-尹宣擧-尹拯으로 이어지는 우계학파의 학풍도 있고, 남인계열의 權得
※ 율곡-사계-우암으로 이어지는 17세기 조선유학의 큰 맥
17세기 산림, 경세가들의 본산, 충남
己-權?-權以鎭으로 이어지는 道山學風도 있었으며, 白湖 尹?도 경학·성리학·예학 등이 공존하
다양한 학술논쟁과 사회비판이 자유로웠던 시대
여 호서유학은 영남유학에 비해 개방적이며 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호서 예학과 학맥(사계 김장생과 충청산림)
산림, 북벌과 예치(의리학과 예학, 國家再造論)
2-2. 호서예학의 전통
우암 학맥의 양현전심(주자, 송자), 정통론(‘尊朱子 攘夷狄’) ↔ 남인 반발
충남유교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호서예학’으로 지칭되는 것으로, 禮 문화의 창출과 수준 높은
이들 산림들이 가졌던 선비 정신은 결코 보수적·관념적이라고 평가될 성질의 것이 아니 것이다.
문화의 향유에 있다. 17세기 예론의 강조나 예송 논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의 당쟁의 폐단과 그들
그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개혁적·혁신적이고 강경하여 그들의 주장이 보수진영의 강한 견제를 받을
의 보수적 성향만을 떠올리고 있지만, 그 중심인물들이 활동했던 조선후기 인조-효종대의 국내외
정도였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남정신에서 조선조의 선비정신을 올
정치적 상황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을 그렇게 단순히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
바르게 본받고 발향하고자 한다면,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부족하고 퇴색된 이러한 현실 비판과 개
수가 있다.
혁정신을 우선적으로 되찾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17세기 한국사회 당대의 최대 화두는, 대외적으로는 北伐, 대내적으로는 禮治였다. 禮治란 왕도
정치 실현의 구체적 내용으로 禮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형태였다. 그리고 바로 그 “國家再造”의
2-3. 조선후기 충남유학 ? 호낙논쟁(인물성 동이논쟁) -
과정을 주도하고 그 현실타개책을 가장 정면에서 제시한 인물들이 바로 “湖西山林”들이었던 것이
다. 호서 예학은 17세기 한국예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 것으로, 17세기 국가기강의 문란과 윤리
그 후 호서유학사에서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우암 송시열의 적전이었던 權尙夏의 문하에서 이른바
강상의 위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16세기 성리학시대의 지나친 思辨化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 物性同異論辯’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즉 人物性 異論을 주장한 南塘 韓元震(1682~1751)과 同論
16세기에는 인간의 심성을 수양하는 심성론이 발달하여, 人心道心說이나 四端七情論이 제기되는
을 주장한 巍巖 李柬(1677~1727)이 모두 호서지역이 배출한 유학자였던 것이다.
등 修己에 치중하였는데, 17세기에 이르러 治人에 비중을 둔 실천윤리, 사회윤리로서 禮論이 발달하
게 되었던 것이다(# 현실론, 경장론, 사회개선론 ⇒ 國家再造論). 임진·병자의 양란, 광해의 패륜,
#. 주자 - 율곡 - 김장생 - 송시열 등 호서 예학(돈암서원)
당쟁의 심화, 민란의 발호, 가뭄과 질병으로 인한 민생의 위기 등으로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윤리
주자 --- 송자 (兩賢傳心) (화양동서원) ⇔ 南人系의 반발
강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윤리의 재건은 시대적 요청이었다(황의동, 「충남유교문화의 특성과 위상」
송시열 - 권상하 - 남당 한원진, 외암 이간
『충청학과 충청문화』3집. 2004).
인물성 이론(호론) : 의리, 북벌, 척사, 의병
이러한 시대적 사상적 배경에서 잉태된 예학이 김장생·김집 부자와 그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
인물성 동론(낙론) : 북학, 개화, 애국계몽
이유태·윤선거·유계 등을 통해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를 주도한 송시열 등 노론세력은 조선이 中華의 嫡統을 계승한 ‘중화문화의 담당자’라는 자부심을
한국유학사에서 16세기는 성리학의 전성기로서 사단칠정, 인심도심, 본연지성기질지성 등 인간의
갖고 있었고, 그리하여 호서 예학은 송대 성리학이 미진하게 남겨놓은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보완하
심성문제 탐구가 철학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天人의 관계에서 나아가 인
고 완성시키려는 의미가 짙다. 이는 주자와 그의 제자들이 미완의 상태로 남겨놓은 예학을 완결함
간과 사물의 관계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즉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으로써 성리학의 道統을 조선성리학이, 그것도 기호학파가 주도적으로 계승, 실현한다는 상징적 의
소위 人物性 同異論爭이 되었다.
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보편, 특수의 논쟁으로 程, 朱의 理一分殊나 율곡의 理通氣局에 근거하고 있었다.
人性과 物性을 놓고 벌인 동일성과 차이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南塘 韓元震과 巍巖 李 柬의 논쟁 초
점은 本然之性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었다. 李柬은 이 人, 物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韓元震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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