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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를 파는 일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산허리에 목이 닿게 팠는데, 바다에서 보이는 곳은 밤에,
안보이는곳은낮에팠다.동원된주민들은외지사람들이었다.인민군들이후퇴한후에는
인민군에 협조한 주민들을 잡아, 토정 이지함선생 묘소 아래와 동틀 제방 안에서 죽이기도
하고,구타하기도하였다.수복후에죽은사람은윤씨와김씨였다.
오무섭 씨는 굴양식도 하였다. 굴이 바위에 붙고, 나뭇가지에 붙는 것에 착안하여, 농사
짓는 주냄비 배를 이용하여 산기슭에서 돌을 실어다가 갯벌에 놓아 양식하였고, 갯벌에 소
나무가지를꽂아양식하였다.굴양식으로도소득을올렸다.
오무섭 씨는 마동 간척지 제방 안에다 갈통을 묻어 소금을 굽기도 했다. 당시 제방 안쪽
이지만 논을 만들거나 천일제염을 하지 않고, 갈통을 묻고, 소금물을 얻어, 솥에 끓여 소금
을 만들었다. 이곳의 갈통은 특별하였다. 제방이 막혀있는 곳이기 때문인지 갯벌을 말려 바
닷물을통과시키지않아도,땅속에서염도높은소금물이나왔다.
고만마을은바닷가한적한곳이라1950년대까지아편을많이재배하였다.오무섭씨집
에서도 밭에 아편을 심었다. 흰색 꽃이 피는 양귀비를 심어 가마솥에 끓여 농축하였다. 농
축시킨아편은팔지는않고상비약으로두고먹었다.횟배
2)
아플때먹으면바로낳았다.
고만 마을 논 가운데에는 통샘이라고 불리는 바가지샘
3)
이 있었다. 물이 좋아 겨울에는
따뜻하고여름에는시원하였다.이샘에는큰뱀장어몇마리가살았는데어른들이샘임자
4)
라고하여잡지못하게해서잡지않았다.늘주민들과함께하였다.
고만 마을 주민들은 사당굴 주민들과 함께 정월 열나흗날 저녁 국수봉에서 당제를 지내
고내려와사당굴입구에서거리제를지낸후,사당굴앞바닷가에서용왕제를지냈다.
고만 마을 주민들은 고정리에 속하기 때문에 고정리 주민들과 상포계를 하였다. 상을 당
하면 계를 타고, 남들이 상을 당하면 곗돈을 부담하였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쌀로 약
속하고 돈으로 지불하였다. 상여는 하나였고, 상엿집은 2개였다. 감적굴에 있었고, 한여에
있어 편리한 대로 두었다. 대개 상을 치른 뒤에 가까운 상엿집에 보관하였다. 상포계의 계
2)회충때문에일어난복통.
3)두레박을이용하지않고바로퍼낼수있는,지하수위가높은샘.
4)샘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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