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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보내다가 1964에 병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빈 채로 폐가가 되어 있다. 묘도 고
향인 인주면 공세리에 있다.
[55] 홍필주
洪弼周
<1857. 9. 7 ~ 1917. 12. 12>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배방면 세교리에서 출생했고 성균관에 입학한 뒤 1889년 관학 응제
에 입격해서 이듬해 별시문과에 직부되기도 했다. 내부주사(內部主事)·안동부참서관·현풍군수를 거쳐
1900년에 대구군수와 중추원의관에 올랐다가 이듬해 물러났다.
1904년 2월에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곧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한 뒤 6월에 이르러 황무지개척권
을 요구하자 이건하(李乾夏)·박기양(朴箕陽)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해서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국민에게 발표하면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6월에는 나철(羅喆)·오기호(吳基
鎬)·이기(李沂) 등과 함께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일왕(日王)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게
한국의 독립 보장을 요구하며‘동양평화를 위한 의견서’
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자강회 평의원이 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3월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같이 이완
용(李完用) 등 을사5적을 처단하기 위해 오적암살단을 만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
편 대한자강회가 고종황제 강제퇴위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11월에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에 적극 참여시켰다. 이듬해인 1908년 4월부터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발
행소장을 맡아 애국지사들의 글을 싣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협회가 점차 친일화하
고 1909년에는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와 연합하자 12호를 끝으로 중단하고 일진회와 일제를 규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1910년 6월 다시 일본에 가서 주요 인사들을 만나 침략 정책에 항의하고 중국의 양
계초(梁啓超)를 만나 함께 일제를 규탄하기도 했다.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장기적인 민족운동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기호흥학회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뒤에 중앙고등학교) 학무부장으로 교육운동을 전
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홍필주의 묘>
<홍필주 묘비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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