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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문장준(文章俊)(1861~1945)
태안군원북면방갈리
에서 남평문씨 성길
(成吉)의 장남으로
1861년 10월 14일 출
생했다. 1894년 2월
상암 박희인으로부터
동학을 전수받아 이때
문장준의 묘 (도고면 효자리)
문장준이 효자리에 처음 정착해 사용한 우물
부터 포교활동을 하였다. 방갈리 접주 문장로와 8촌간이며 조석헌의 아들 명승(明承)이 사
위이며육임의직임중에도집(都執)을맡고있던중갑오년9월그믐날방갈리기포모의를
장로와함께주도했다.
홍주성에서대패하여농민군을이끌고목욕리(沐浴里)에퇴거했다가민보군과일본군의추
격이 뒤따라오자 천신만고 끝에 농민군을 이끌고 고향으로 와 해산 피신하였다가 11월 15
일에관군이민보군을앞세워 대대적인색출작업에체포되었다.서산으로이송되었다가해
미성으로 잡혀가 10여일동안 추위와 기갈로 고생하다 관군 지휘관인 이범서(李範緖)에 의
해천우신조로문장권과함께풀려나3일동안유리걸식하며본가로돌아왔다.그러나민보
군의끈질긴색출처형이극심하자가족의목숨을도모할수없어서김선여(金善汝),김성칠
(金成七), 강운재(姜雲在), 김명필(金明弼), 김황운(金黃雲) 등과 식솔들을 데리고 배를 타
고도피하였다.
그는1895년에숙부댁에몰래잠입하여흩어진동학교도소식을파악하고박덕칠의밀지
를전달하던조석헌과함께동학도인의규합을위해여러포중을돌며도리강론을했으며향
후대책을긴밀히논의하였다.
보은갈목리에피신중인상암박덕칠의집안물품과먹거리를조달해주었다.1897년박덕칠
의공문과2백여의교첩을가지고각지역두목이모인동해리조석훈집에서교수(敎授)에
피임되었다.1909년11월부터태안대교장조석헌씨대신관내대소사를총괄하였다.
1911년 1월에는 온양 동변리에서 11명이 모여 49일 참성(參聖)공부를 했다. 1913년 중앙
시천교로귀거했다가병진년(1915년)중앙시천교가흩어져천도교로돌아왔다.
후손들에게전해오는문장준에얽힌재미있는이야기가있는데증손자문형식의말에의하
면“증조부께서효자리로정착하여살고계실때집을가려면항상냇가를건너야하는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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