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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7월 2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 8월 공주형무소
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과 옥고로 생긴 병이 위독해져서 가출옥했으나 9월 10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
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염치읍 강청리에 있다.
[53] 최병수
崔炳秀
<1876. 7. 7 ~ 1919. 4. 4 >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선장면 대정리 사람이
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독립을
위하여 좋은 기회라 믿고 4월 4일 선장 장날을 이용하여 독
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도고면(道高面)·신
창면(新昌面)에 있는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역설했다. 이날 정수길(丁壽吉)·김
천봉(金千鳳)·서몽조(徐夢祚)·임천근(林千根)·오상근(吳
相根) 등과 함께 그는 200여명의 만세 시위군중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그는 경찰에
<최병수의 묘>
게 체포되어 온양헌병대 선장 주재소로 연행되었으며 그곳
에서 헌병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
장을 추서하였다.
[54] 최익수
崔益秀
< 1894 ~ 1964 >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인주면 공세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호는 일청(逸靑)이다.
20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이때 일부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의식이 강해지면서 그도 3.1운동에 참여
하고 재일유학생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
부로 간 뒤 그곳에서 충남 대표의 책임을 맡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을 전개했다. 귀국해서 대지주를 상
대로 한 모금운동에 어려움을 겪다가 1921년 당시 아산군 금융조합에 근무하던 인척(사촌처남매제 사이)
진수린(陳壽麟)을 설득해서 금융조합 금고의 현금을 빼낸 뒤 함께 상해로 밀항해서 임시정부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다시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 위해 귀국한 뒤 집에서 약 반년을 은거하던 중 눈치를 챈 일본 경
찰이 집 주변을 포위하고 체포하려는 순간 극적으로 빠져나와 서울로 피신한 뒤 최석창을 포섭해서 상해
로 동행했다. 그 곳에서 한동안 활동하다가 다시 귀국하던 중에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모
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종로경찰서를 거쳐 공주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에 집행유예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8.15해방 후 친구이자 동지였던 조병옥(趙炳玉) 등이 정계 진출을 권유했지만 혼탁한 정치풍조에 실망
하여 끝까지 사양했다. 한때 정부의 권고로 방위군 간부직을 잠시 맡기도 했지만 초야에 묻혀 조용히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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