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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했다.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이 비밀결사에 가입한 뒤
회원 규합 및 연락,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2월 28일 공주 지방법원
을 거쳐 1919년 9월 26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1년 7개월의 징역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1] 정태영
丁泰榮
<1859. 8. 3 ~ 1922. 8. 26>
아산 출신의 동학 지도자다. 본적은 선장면 대정리이고 본관은 나주(羅州)다. 본명은 건섭(建燮)이며 규
희(奎熙)의 아버지다. 안교선(安敎善)과 박인호(朴寅浩)가 내포 지역에서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전개하던
1880년대 말부터 1890년대 초 사이에 동학에 입교하고 1892년 초부터 시작된 교조신원운동 중 1892년
10월의 공주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인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
이 일어나고 9월의 2차 봉기에 이르러 호서지방 대접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의 기포령이 내려지자
10월에 신창 지역 접주 김경삼(金敬三)·곽완(郭玩)·이
신교(李信敎) 등과 함께 봉기했다. 신례원 창소리에서
예산 지방 동학농민군과 합류한 뒤 10월 28일 홍주성 공
략에 참여했다. 일본군은 물론 관군과 유회군까지 동원
된 진압군에게 패한 뒤 뿔뿔이 흩어진 채 오랜 동안 도
피 생활을 했다.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본
적이 선장면(仙掌面)인 것으로 보아 도피를 위해 예산 대
술에 가서 살다가 1902년부터 1907년 사이에 아산의 선
장면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1922년에 세상을 떴고
묘는 선장면 군덕3리 선영에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
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에 따라 명예가 회복되
<정태영(정건섭)의 묘>
었다.
[52] 진수린
陳壽麟
<1898. 12. 21 ~ 1930. 9. 10>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신창면 신달리에서 태어났으며 신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
년에 아산군 금융조합에 근무하던 중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 모집을 위해 들어온 인척(사촌 처남 매제 사
이) 최익수(崔益秀)를 돕기 위해 금융조합의 공금을 빼내어 최익수·이종락(李鍾洛)과 함께 상해로 건너
갔다. 이후 임시정부의 재산계 서기로 임명되어 광동(廣東)·무창(武昌)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1927년 11월 상해 한인독립청년회(上海韓人獨立靑年會) 등을 중심으로 중국 각지의 청년회를 통합해서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을 창립한 뒤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8년 12월 몰래 입국해서 아산군 신창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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