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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충수(河忠秀)의 부인이 열녀(烈女) 경주배씨(慶州裵氏)이다. 하태길의 묘는 영인면 신운리에 있다.
이렇듯 진양하씨(진주하씨) 집안 여럿이 영인면 신운리로 함께 들어온 뒤 후손들이 번성하여 오늘
날까지 아산의 각지에서 살고 있다.
[147] 청주한씨 한승이
| 韓昇履
<1797년(정조21년) ~ ? >
조선 후기의 인물로 청주한씨(淸州韓氏) 28세(世)이며 몽계공파(夢溪公派) 아산시 지역, 신창면 득
산리 (현재 득산동) 입향조이다. 선대는 천안에서 거주하였다. 송악면 유곡리에 현재 거주하는 한홍
섭씨의 5대조이다.
고조부는 한영기(韓永基, 1663~?)이고 증조부는 한정곽(韓廷
)이며 조부는 한국윤(韓國潤)이다.
아버지는 한동수(韓東秀, 1765~?)이고 어머니는 회덕황씨이다.
한승이는 한동수의 계자로 왔다. 생부는 아버지의 바로 위의 형인 한후상(韓厚相)이고 한후상 역시
먼 친척인 한성주(韓聖周)의 계자로 갔던 것이니 한승이는 결국 가까운 혈족에게 돌아온 셈이다.
그의 자는 광서(光瑞)이고 부인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안임(安任)의 딸이다. 그가 득산동으로 오
게 된 사연과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신창 일대에 순흥안씨들이 널리 퍼져 살았으니 혼인을 계기로
해서 온 것으로 본다. 묘는 득산동에 있었으나 농공단지 개발로 인해 신창면 오목리로 옮겨 모셨다.
한승이도 손이 없어서 친척 한직용(韓稷容)의 아들 갑교(甲敎)를 계자로 들였다. 한갑교는 다행히
용석(庸錫)과 필석(弼錫) 두 아들을 두었다. 이후 한용석이 3남3녀, 한필석이 3남을 두면서 후손이
많이 퍼져 오늘까지 번창하고 있다.
[148] 청주한씨 한익명
| 韓翼明
<1596년(선조29년)~1651년(효종2년)>
조선 중후기의 인물로 청주한씨(淸州韓氏) 21세이고 정선공파 중 돈령공파(敦寧公派) 인주면 도흥리
입향조이다. 현재 인주면 도흥리에 거주하는 후손 33세(世) 한용구(韓容九, 80세)씨의 12대조이다.
그의 고조는 별제 등을 역임한 한여필(韓汝弼)이고 증조는 문과급제 후 판관 등을 지낸 증영의정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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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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